<시리즈> 컴퓨터 파노라마 (32);방황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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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서울 올림픽이 막을 내리기 전까지 청계천 전자상가는 누가 뭐라해도한국의 「실리콘밸리」로 통했다. 그러나 청계천 전자상가가 이전해 새로 자리잡은 용산 전자상가를 두고 다시금 한국의 실리콘밸리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청계천 전자상가 출신으로 10여개의 기업 연구소를 두루 거친 후 현재 굴지의 기업에서 마침내 임원 반열에 오른 중견 엔지니어 A씨의 설명.

『80년대 청계천 사람들에게는 순수한 정열이 있었습니다. 애플의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나 스티브 워즈니악, CP/M를 개발한 게리 킬 들 같은 영웅이 되는 꿈을 꾸었던 거죠. 돈은 나중 문제였습니다.』

A씨의 말은 청계천시대를 계승한 용산상가는 명분론적 영웅의 꿈보다 어떻게든 한몫 잡아보겠다는 실리론을 택했다는 것이다.

청계천 전자상가가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은 당시 한 천재 컴퓨터 소년의 인터뷰를 실은 몇몇 신문이었다.

83년 1월 20일께 국내 신문은 일제히 「약관 16세 컴퓨터 박사」라는 제목으로 최초의 한글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한 박현철 군(당시 서울 북공고 2년)을이규호 문교부 장관이 불러 장학금을 지급하고 격려했다는 기사를 실었는데그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었다.

『박군은 중학교 2년 때부터 청계천 상가를 홀로 누비면서 조립용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오디오 부품을 구입, 이를 스스로 조립하면서 전자의 세계를터득했고 3학년 때부터는 상가 컴퓨터 전문가들과 교류하면서 컴퓨터를 익히기 시작했다. 박군이 개발한 소프트웨어는 한국의 실리콘밸리인 청계천상가에서 가장 인기있는 애플 컴퓨터용 한글워드프로세서였다.』

이 기사는 박현철 군의 천재성과 함께 한국 컴퓨터산업의 요람으로 청계천상가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일반인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실제 기사들도 박군의 천재성을 발굴한 것은 학교나 선생님이 아니라 한국의 실리콘밸리인 청계천 전자상가였다는 식으로 쓰여 있었다.

청계천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현재 용산상가에서 주변기기 회사를 운영하고있는 P씨의 이에 관한 회고.

『제 기억으로는 이 기사가 컴퓨터 상가 청계천을 알리는 최초의 보도였습니다. 청계천 사람들은 한동안 박군 이야기를 화제에 올렸고 어떤 이는 기사를 그대로 오려 가게 유리문에 붙여두고 일반인들의 관심을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실리콘밸리라는 명성은 희미해졌지만 아직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청계천 전자상가는 청계고가도로를 중심으로 종로 쪽으로는 「세운상가」와 「아시아상가」, 을지로 쪽으로는 「대림상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운상가는 주로 가전과 컴퓨터를, 아시아상가는 전기, 전자부품을 각각 취급했고 대림상가는 유기장용 게임기나 오락기 전문상가였다. 이 가운데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통했던 곳은 컴퓨터상가의 대명사 세운상가였다.

세운상가 건물은 행정구역상으로 종로구 장사동이지만 실제는 종로3가와청계천4가를 완전히 가로질러 맞닿는 형태여서 종로 방향에서는 종로 세운상가, 청계천 쪽에서는 청계천 세운상가 하는 식으로 불렀다.

이 건물은 67년 서울시가 시내의 전파상들을 한곳에 입주시켜 동양 최대의전자상가로 육성한다는 방침에 의해 건립됐다. 세운상가가 전자상가로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삼성전자와 금성사가 본격적으로 TV와 세탁기 등을 생산했던 70년대 중반 이후였다. 가전 도매상이 이곳을 수도권과 지방을 연계하는최대 요충지로 여기면서 국내 최대 전자상가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70년을 전후해 이곳에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나 컴포넌트 오디오 조립용품을 공급하는 점포들이 성시를 이루었다고 회고하는 이들도 있다. 70년대 후반 세운상가 일대에는 라디오, 오디오 부품 또는 조립 키트 전문점포만 2백여곳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박현철 군처럼 직접 완제품을조립해보려는 공업고등학교 학생과 전파상들이 세운상가를 안방처럼 드나들게 됐고 마침내는 전국에 조립 전자제품 전성기를 구가하게 됐다는 것이다.

가전과 오디오 일색이던 세운상가에 컴퓨터 부품과 조립 키트, 완제품을공급하는 점포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시점은 불분명하다. 누가 이곳에 최초의컴퓨터 점포를 냈는지에 대한 자료도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전국에 1백여개의 유통망을 가진 S씨의 회고.

『제가 입주한 79년 가을만 해도 컴퓨터 매장이 20여개나 됐지만 규모가작았고 취급 품목도 대형컴퓨터 소모품이나 주변기기 부품이었습니다. 애플완제품이나 조립 키트를 구비한 곳은 드물었습니다. 대부분은 문서세단기 등을 취급했고 어떤 곳은 밀수 오디오로 수익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컴퓨터만취급하게 된 것은 83년부터입니다.』

S씨의 회고대로라면 세운상가에서 처음부터 컴퓨터만 취급하겠다고 나선곳은 거의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수익이 좋았던 가전 등을 취급하다가 차츰컴퓨터에 손을 대게 됐다는 것이다.

아무튼 세운상가가 컴퓨터 상가로 발돋움한 시점은 박현철 군이 이곳을 누비던 82년께로 추정되고, 이 시기는 또 애플과 IBM이 주도하던 PC산업이 확장일로를 달리던 때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PC는 대형컴퓨터에 익숙해있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것이었지만 크기가 작으면서 성능이 뛰어났고 가격이 싸다는 장점 때문에 컴퓨터를 새로 구입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또 TV나 라디오처럼대량판매가 가능하고 물류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국내 업계는 너도나도 PC분야 진출을 계획하던 터였다. 세운상가가 컴퓨터전문상가로 탈바꿈하는 과정은 바로 이같은 배경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

82년말 세운상가 내부 상가배치도를 보면 1, 2층은 가전과 난방용품 등 전기제품, 3층은 사무기기와 수입 오디오 등 가전, 4층은 컴퓨터, 5층에서 8층까지는 아파트형 공장과 사무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가운데 4층의 컴퓨터상가는 2~3평에서부터 10평에 이르는 크고 작은 점포가 무려 1백40여개나 밀집해 있었다. 이들 점포는 각각 제품설계, 부품조달, 생산, 판매, 사후지원 등 일반 컴퓨터회사의 모든 업무를 직원 두세명이해결하는 초미니 기업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 초미니 기업들은 독자적인상표보다는 「애플」나 「SE 8001」 또는 일본 아스키사의 「MZ-80」 등 유명 8비트 PC를 복제한 호환기종을 생산하는 일을 주로했다. 여기서 얻은 수익금은 독자적인 소프트웨어나 주변기기를 개발하기 위한 운영자금으로 쓰였다. 적어도 90년 초반까지 국내 PC사용환경에 필요한 각종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외국제품을 들여와 토착화하는 과정이 대부분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진행됐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제품은 「청계천카드」(80년대까지 한글처리의 대명사였던 7비트 한글카드)하는 식으로 불렸다. 프린터출력용 롬이라든가 한글 바이오스를 비롯해 로터스1, 2, 3 등 외국 소프트웨어의 한글처리 솔루션, 다양한 형태의 입출력카드, 그래픽카드 등이 주요 개발품이었는데 이것은 일반 PC업체들도 감히 손댈 수 없었던 당시로서는 고난도 기술을 요하던 분야였다.

89년에 빛을 본 한글과컴퓨터의 「한글」워드프로세서 역시 세운상가를 드나들던 이찬진 씨 등 젊은이들에 의해 개발됐고 이것을 이곳에 입주해 있던S씨가 1천만원을 들여 상품화해준 결과였다. 이때의 기억을 이찬진 사장은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한글1.0을 개발하던 시절 학교(서울대)를 마치면 거의 매일 S씨의 가게에 나가 고객지원 아르바이트를 했지요. 겨우 점심값 정도 버는 것이었지만사실은 돈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드웨어에 대한 메커니즘을 이때 완전히익혔지요. 한글이 특정 PC에서만 실행되던 다른 워드프로세서와 달리 모든기종에서 호환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설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의 경험 덕이었습니다.』

세운상가에서 팔리거나 완제품에 끼여 공급되던 제품의 가장 큰 특징은 저작권자가 없고 변종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제품을 개발자한 사람이 완성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통해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업그레이드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지금의 용어로 표현하면 이 과정은 특정제품을 해부해 새로운 응용제품을 개발해 내는 리버스엔지니어링(역공학)그 자체였다. 그러나 성행한 이 리버스엔지니어링 때문에 세운상가는 80년대말 미국과 일본 정부에게서 「동양 최대의 복제 소굴」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세운상가의 개발력은 정부에서도 인정하던 터여서 문교부 교육용 컴퓨터보급계획과 같은 정부정책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거나 전국 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 등 정부 공식행사의 스폰서로 나선 곳도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 마이크로컴퓨터나 PC라는 이름으로 국산 컴퓨터를 전문 생산하던 곳은 금성반도체, 동양정밀, 동양나이론(효성컴퓨터), 금성사 등 대기업 계열과 삼보컴퓨터, 한국상역(현 한국컴퓨터) 등 전문기업을 포함, 모두 10여개사 내외였다. 82년 말까지 국내에 공급된 PC는 대략 1천대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4백여대 정도를 세운상가에서 공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82∼84년까지의 PC산업 초창기, 세운상가에서 명성을 날린 곳으로는 홍익전자, 경성반도체, 신성전자, 구미전자, 중앙컴퓨터, 희망전자개발, 한림전자 등이 꼽힌다. 사실 이들이 초창기 PC산업에 공헌한 노력만을 평가한다면이들 가운데 몇개는 적어도 96년 현재 국내 컴퓨터업계 기업순위에서 10위권내에 들어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초창기 세운상가 멤버가운데 지금까지 기업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30여곳 정도. 그나마그때나 지금이나 기업 외형에서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곳이대부분이다.

<서현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