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세상읽기] 동구권 국가에서의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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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세상읽기] 동구권 국가에서의 SF

 20세기는 과학기술 문명이 찬란하게 꽃을 피운 시대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에릭 홉스본의 저서 제목과 같이 날카로운 이데올로기 대립이 계속된 ‘극단의 시대’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SF 역시 문화 상품으로, 문화 콘텐츠로 창조되고 소비됐다. 하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SF라는 장르가 조금 다르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 우선 사회주의 체제 자체가 근원적으로 유토피아 건설의 실험장과 비슷한 개념을 갖는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정당하고 밝은 미래를 약속한다는 비전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려고 애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며, SF에 국가 차원에서 관심을 갖고 많은 지원과 간섭이 가해졌다.

 소비에트 연방 초기 시절부터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체제 선전을 위한 SF가 등장했다. 1918년 발표된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의 희곡 ‘미스테리야 부프’에서는 대홍수로 세계가 모두 물에 잠기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방주에 올라 주도권을 잡기 위해 투쟁을 벌이며, 결국 사회주의 이상을 신봉하는 노동자들이 자본가를 비롯한 모든 이를 물리치고 신세계에 도착해 이상사회를 건설한다. 소비에트 SF 문단을 대표하는 이반 예프레모프는 1959년작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미래 우주탐사를 다루면서 사회주의 이상을 찬미했고, 셰르스토비토프 감독은 이를 영화화했다.

 하지만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SF는 그저 체제 선전을 위한 도구에 그치지 않았다. 폴란드의 스타니스와프 램은 ‘솔라리스’ ‘사이버리아드’ 등에서 과학과 문명을 포괄적으로 전망하고, 다채로운 소재를 자유자재로 건드리면서도 풍요로운 사색의 결과를 SF 장르의 법칙에 걸맞은 완성도 형태로 꾸준히 발표했다.

 소련에서도 걸출한 SF 작가가 등장했는데 바로 ‘인간의 섬’ ‘종말 전 10억년’ ‘노변의 피크닉’ 등을 쓴 아르카디·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다. 문학적 재능을 가진 형 아르카디와 천문학자인 동생 보리스의 과학적 마인드가 합쳐지면서 뛰어난 SF 작품이 탄생했으며, 서구 세계의 SF를 능가하는 깊이와 뛰어난 비전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사회 부조리를 예리하게 파헤치고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비판하는 작품 속 메시지로 인해 소비에트 정부 당국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작가들의 창작 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전파를 문학의 첫 번째 미덕으로 삼았고, 그러한 취지에 부합되지 않는 작품의 발표를 막고 작가의 활동을 제한했다. 작가들에게 SF라는 장르문학은 이러한 국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도피처 역할을 하게 됐고, 이로 인해 공산권 진영에서는 뛰어난 거장들이 도피성 SF를 발표하는 현상이 자리를 잡는다. 동독의 귄터 쿠네르트, 소비에트 연방의 칭기즈 아이트마토프 등은 SF라는 장르를 사회를 은유적으로 풍자하기 위한 도구로 삼은 대표적인 작가다. 귄터 쿠네르트는 본령인 시를 창작하면서도 과감하게 소재를 우주나 미래 세계에서 찾아 SF적인 마인드로 작품을 쓰곤 했으며, 꾸준히 발표한 ‘때 아닌 안드로메다 성좌’ ‘병 통신’ ‘아담과 이브’ 등의 단편에서 동구 사회의 폐쇄성과 거짓된 유토피아의 망령을 은유적으로 유머러스하게 비판했다. 칭기즈 아이트마토프는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 체제에서 문단 전체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던 지도적인 인사였지만, 한편으로는 검열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 ‘백년보다 긴 하루’와 같이 SF로 포장한 작품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와 냉전, 군비 경쟁 등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김태영 공학박사, 동양공업전문대학 경영학부 전임강사 tykim@dong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