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 <9> 전산망위 “정보통신 신설 등 국가전산화 추진체계 3개안 제시”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9>

전산망위 “정보통신 신설 등 국가전산화 추진체계 3개안 제시”

노 대통령 전산망위 과기처 이관 재가...두 달 만에 체신부로 변경



전산망위 체신부 이관 막후

5공(共) 말기인 1987년 12월.

이듬해 2월 정권교체를 앞두고 정국은 어수선했다.

청와대 소속인 전산망위원회는 정보통신부 신설 방안을 포함한 국가전산화 추진체계 방안을 마련했다. 정보통신부 조직개편의 첫 공개 신호탄이었다. 김영삼 정부가 1994년 12월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하기 7년 전 일이다.

5공 정부는 일란성 쌍둥이처럼 뿌리가 같았던 6공에서 정보화와 정보산업 관련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되기를 바랐다. 전산망위원회는 이런 염원을 담은 3개 안을 마련했다.

제1안은 부총리급의 중앙부처 신설이다. 가칭 국가전산기획원을 신설해 관련부처의 국가전산화 및 정보산업 관련 정책 기능을 일부 흡수한다는 것이다. 국가전산화 기본계획 수립과 전산망 조정위원회 운영, 정보산업 운영시책, 정보산업 관련기술개발 정책 등을 담당하며 신설부처 장관이 전산망조정위원장을 겸임한다는 안이다.

제2안은 기존부처를 개편하는 내용이다. 바로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개편한다는 구상이다. 다만 우편 및 금융분야는 독립청 또는 공사화한다는 것이다. 관련 부처의 국가전산화 및 정보 산업정책과 집행 기능을 흡수하거나 통합한다는 계획이다.

제3안은 대통령 특별보좌관제 신설이다. 대통령 비서실에 국가전산화 및 정보산업담당 특별보좌관 또는 수석을 신설한다는 구상이다. 이 경우 기존부처 기능을 현행대로 유지하고 전산망 조정위원회 사무국은 대통령 비서실 소속으로 존치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렵다면 조정위원회는 체신부로 이관한다는 내용이다.

6공은 이런 안 중 일부는 수용했지만 조직개편에 적극 반영하지 않았다. 위원들인 각 부처 차관들도 당시 이런 안에 공개적으로 반발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 업무에 관여했던 A씨의 진단.

“6공 정부 인수팀에서 이 안을 채택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5공 비리 등으로 눈 돌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5공은 1982년부터 기술드라이브를 선언, 대통령 주재로 기술진흥확대회의를 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기술진흥과 전자정보통신산업 발전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고 그 분야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5공이 출범해 서슬이 퍼렀던 1983년 1월 28일.

1983년도 제1회 기술진흥확대회의가 전두환 대통령 주재로 중앙청 중앙회의실에서 열렸다.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경제난국을 타개하는데 가장 시급한 것은 기술혁신”이라고 강조했다. 이정오 과학기술처 장관(KAIST원장 역임, 작고) “1983년을 ‘정보산업의 해’로 정해 정보산업 기본법을 제정하는 등 정보화 시책을 추진하겠다”고 보고했다.

이후 1984년 6월 정부는 국가기간전산망사업만을 전담하는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를 설치했다. 위원장은 강경식(경제부총리 역임) 대통령 비서실장이 맡고 위원은 과기·체신·상공·문교부 차관과 청와대 정무2수석과 경제수석, 교문수석장 등 10여명으로 구성했다. 간사는 경제비서실 홍성원 과학기술비서관(KAIST서울분원장, 현대전자 부사장, 시스코시스템즈코리아 회장 역임)이 맡았다.

정부는 1986년 5월 12일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을 제정·공포했다. 이에 따라 명칭도 전산망위원회로 바뀌었다. 이 법안은 당초 체신부가 제안했으나 상공부와 총무처 등 다른 부처의 견제로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청와대가 의원입법 형식으로 만들었다. 이상희 의원(4선 의원, 과학기술처장관 역임, 현 국립과천과학관장)이 총대를 메고 법안을 발의했다. 아이러니 한 점은 이 법안에 ‘정보통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 대통령은 1987년 2월 조정위원회 구성에 관한 재가를 했다. 전 대통령은 그동안 박영수 대통령 비서실장(서울시장 역임)이 맡았던 위원장에 민간인 신분이던 김성진 한국전산원장을 낙점했다. (위원장은 1988년 8월 다시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바뀌었다). 간사를 맡았던 홍 비서관의 증언.

“김 위원장 외에 다른 사람이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이 체신부와 과기처 장관을 역임했고 그해 1월 출범한 한국전산원장(현 한국정보사회진흥원)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전 대통령이 낙점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전 대통령과 육사 11기 동기로 육사 수석입학과 수석졸업이란 기록을 세운 수재였다. 미 플로리다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로 육사 교수와 주미대사관무관을 거쳐 육군준장으로 예편했다. 안기부 차장과 국방과학연구소장을 거쳐 1983년 10월 체신부 장관으로 발탁됐고 이어 과학기술처 장관, 과학재단 이사장, 한국전산원장을 역임했다.

위원으로는 문희갑 경제기획원 차관(대통령 경제수석, 대구광역시장 역임), 이상희 내무부 차관(내무부 장관 역임), 김찬재 문교부 차관, 정영의 재무부 차관(재무부 장관 역임), 홍성좌 상공부 차관(현 도심공항터미날 고문), 장기오 총무처 차관(총무처 장관 역임), 황인수 국방부 차관, 오명 체신부 차관(과기부총리 역임, 현 건국대 총장), 권원기 과기처 차관(한국기술교육대학교 총장 역임), 강우혁 청와대 정무2수석(14대 국회의원 역임), 김재윤 한국은행 부총재 등이 임명됐다.

1987년 9월, 국가전산망위원회는 사무국을 설치했다. 사무국장은 위원회 간사인 홍 과학기술비서관이 맡았다. 홍 비서관이 1989년 3월 청와대를 떠나자 경제비서실 정홍식 비서관(정통부 차관, LG데이콤 부회장 역임)이 사무국장을 겸임했다.

사무국 인력은 각 부처에서 파견을 받았다. 체신부에서는 석호익(현 KT 부회장), 이성옥씨(현 한국정보산업연합회 부회장) 등이 파견 근무를 했다. 김원식(정통부 미래정보전략본부장 역임, 현 세종 고문)씨는 상공부에서 파견 나왔다가 정보통신부로 자리를 옮긴 케이스다.

노태우 정부는 1989년 6월 1일 청와대 기구인 전산망위원회를 체신부로 이관했다. 이런 방침은 이미 확정한 상태였다. 그러나 돌발 사태가 발생해 대통령이 같은 사안에 대해 두 번 재가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1989년 3월 6일, 문희갑 청와대 경제수석은 ‘위원회를 과학기술처 주관으로 운영토록 개편코자 한다’는 내용으로 노 대통령 재가를 받았다. 과기처 최영환 차관(과학문화재단 이사장 역임)은 문 경제수석의 출신교인 경복고 동문이었다. 기안자는 구본영 경제비서관(대통령경제수석, 과기처 장관역임, 작고)인 것으로 알려졌다.

과학기술비서관실은 발칵 뒤집어 졌다. “어째 이런 일이…” 당당 비서관도 모르는 일이 벌어졌으니 기각 찰 일이었다.

정홍식 비서관(사무국장 겸임)은 2007년 펴낸 자서전 ‘한국IT정책 20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과학기술비서관도 모르게 노태우 대통령이 결재를 한 바 있다. 과학기술처의 요청에 따라 IT정책을 잘 모르는 매크로 담당 비서관들이 건의했다고 나중에 알려졌다. 만일 그 결재대로 진행됐다면 우리나라의 정보화는 그들 부처가 주도했을 것이다.”

이 시각 체신부 차관실. 신윤식 차관(데이콤사장, 하나로통신회장 역임, 현 정보환경연구원 이사장)도 위원회가 과기처로 넘어간다는 보고를 받았다.

신 차관의 당시 상황 설명.

“체신부로 오기로 했던 위원회가 느닷없이 과기처로 가다니 말이나 됩니까. 즉시 문 경제수석에게 면담을 신청했어요.”

신차관은 문 수석과 공군장교로 근무할 때부터 안면을 턴 사이였다. 고시는 문 수석이 후배이나 군에는 먼저 입대해 신차관이 공군 소위시절 문 수석은 중위였다.

그런 관계로 신 차관이 우정국장 시절 경제기획원 예산실장이던 문 실장의 도움을 받은 적도 있었다. 우체작업 기계화 등에 대한 예산이 삭감되자 문 실장에게 1시간여 사업의 필요성을 브리핑해 예산을 3배나 늘린 것이다.

“알고 보니 그의 부친이 대구 지역에서 35년간 우체국에서 근무했답니다. 우체국장 관사에서 살았는데 자신이 우체국 돈으로 공부를 했다는 말을 했어요.”

청와대 경제수석실에서 만난 두 사람은 언쟁에 가까운 논쟁을 벌였다. 문 수석은 장관급인데다 노 대통령과 고교 동문으로 청와대 실세로 통했다.

“아니 이미 체신부로 오기로 된 위원회를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그동안 체신부에서 일을 다 한 것 아닙니까. 이게 말이나 됩니까.”

문 수석도 화를 벌컥 내며 언성을 높였다.

“아니 청와대에는 바보만 있단 말입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 아닙니까.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켜야지 이게 뭡니까.”

이에 신 차관은 “미안하다”고 사과한 후 문 수석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설득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당시 청와대 내부 소식에 정통했던 C씨의 해석.

“당시 청와대에 5공 비리와 관련한 행망 투서가 많이 들어왔어요. 체신부에 대한 일종의 불신이라고 봅니다.”

이 후 4월 하순 총무처와 상공부, 과기처, 체신부 등 4개 부처 차관은 모임을 갖고 위원회를 체신부로 이관하기로 합의했다.

“그것은 일종의 요식 행위였어요. 실제론 청와대가 다 결정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그해 5월 앞서 재가한 이전 기관을 체신부로 바꾸는 내용의 전산망조정위원회 운영이관 및 위원장 교체 지명 건의라는 문서에 서명했다. 그 내용은 ‘정보화 사회에 대비한 전담 행정기관이 설치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체신부로 이관하고 위원장도 현재의 홍성철 대통령 비서실장에서 최영철 체신부 장관으로 교체한다는 내용이다. 이 문안 중 ’정보화 사회에 대비한 전담 행정기관이 설치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체신부로 이관하고‘란 내용은 정 비서관이 직접 넣었다고 한다.

이런 재가 번복 배경에 대한 정 비서관의 회고록 증언.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한국전기통신공사 때문이었다고 본다. 위원회가 정보화와 정보산업 관련 정책을 추진하려면 그만한 인력과 자금이 있어야 했다. 그런 인력과 자금을 지원할 수 있는 조직이 바로 통신공사였다.”

이 결정은 한국의 IT정책, 즉 정보산업과 정보화 정책의 중심을 체신부로 옮기는 결정적 계가가 됐다. 정부가 정보화 전담 행정기관을 만든다면 그 주체는 체신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전산망위원회가 체신부로 오지 않고 다른 부처로 갔더라면 정보통신부 신설은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체신부로 위원회 이관을 성사시킨 정홍식 비서관은 그해 6월 5일 체신부로 전보발령이 났다. 청와대 근무 10년 3개월이란 기록을 남기고 정들었던 청와대를 떠났다.

행정 조직의 지각변동은 미래를 향한 새 출발을 의미했다. 체신부는 이런 여세를 몰아 미래부서인 정보통신부 신설에 가속도를 냈다.

IT칼럼리스트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