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76>

 -정보통신산업발전종합대책

 

 1996년 끝자락인 12월 6일 금요일 오후.

 강봉균 정보통신부 장관(재경원 장관 역임, 현 민주당 국회의원)은 이날 한승수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국무총리 역임, 현 김앤장 고문) 주재로 재경원 회의실에서 제2차 국가경쟁력강화추진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다. 강 장관은 이 자리에서 ‘정보통신산업발전 종합대책안’을 보고했다.

 종합대책안은 ICT강국 코리아 건설의 안내도였다. 회의에는 9개 경제부처 장관을 비롯해 경제계와 학계, 과학기술계, 언론계, 시민단체 등에서 민간위원 12명이 참석했다.

 추진위원들은 강 장관이 보고한 종합대책안을 만장일치로 정부계획으로 확정됐다.

 정부는 그해 9월 3일 열린 경제장관간담회에서 우리 경제 체질강화를 위한 핵심전략과제로 정보통신산업을 선정해 정통부 주도로 ‘종합대책’을 마련키로 한 바 있었다.

 더욱이 그해 10월 14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1차 정보화추진확대보고회의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정보화는 문민개혁의 성공과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한 강력한 수단”이라며 “정보통신산업을 21세계 주도산업으로 육성할 종합대책을 강구하겠다”고 역설했다.

 어느 정부에서나 정책의 승패는 대통령 관심과 추진의지에 달려 있다. 김 대통령의 정보화 실천 의지는 일회성 ‘반짝 불꽃놀이’가 아니었다.

 대책안은 치밀했고 구체적이며 전략적이었다. 경상현 초대장관(현 KAIST 겸직교수) 재임 시 시작해 이석채 장관(현 KT 회장)을 거쳐 강봉균 장관 때 최종 확정한 것이다.

 강봉균 장관은 취임 후 1996년 10월 10일부터 11월 8일까지 △정보통신기기 △소프트웨어 및 ST △콘텐츠 △부가통신사업 △통신사업 등 5개 분야에 대해 모두 11차례에 걸쳐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를 위해 해당분야 전문가들로 정보통신산업부분별협의회를 구성해 업계 의견을 폭넓게 수렴했다. 정통부는 이 안에 대해 11월 15일부터 11월 30일까지 재정경제원과 통상산업부 등 관련 부처와 협의도 거쳤다.

 강봉균 장관의 회고.

 “제가 취임하고 보니 정홍식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 차관, 데이콤 부회장 역임) 주도로 이미 종합대책안을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1996년 9월 3일 경제장관 간담회에서 ‘최근 경제상황과 향후 정책방향’ 등과 관련해 정보통신산업이 21세기 한국경제발전 초석이 돼야 한다는 방침이 정해졌습니다. 정보통신산업이 21세기 국가경제의 생산, 수출, 고용을 주도하는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전략을 정통부가 마련하고 이를 위원회에서 정부계획으로 확정한 것입니다.”

 종합대책안에는 △정보통신산업의 수요기반 확충 △전략적 정보통신기술 개발 △정보통신 전문인력 양성 △정보통신 분야 중소기업 육성대책 △개방화에 대비한 통신사업 경쟁체제 △위성사업과 통신·방송 융합 △정보통신산업의 해외 진출 △장애인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정보통신 등이 포함됐다. 그 당시 통신과 방송융합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통신비 감면, 원격교육 등의 구체적 실천방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정부가 마련한 대책 안에 따르면 소프트웨어 산업의 생산과 수출을 올해 전망치 38억달러와 3000만달러에서 5년 후에는 각각 172억달러, 25억달러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등 오는 2001년까지 선진국 수준에 진입할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 산업을 중점 육성키로 했다.

 정보통신 중소기업에 대한 정보화촉진기금 융자지원 규모를 현재의 연간 2000억원에서 2000년에는 3000억원까지 확대하는 한편 정보통신 전문인력 양성을 위해 1998년 3월 개교 일정으로 정보통신전문대학원을 설립하기로 했다(이 내용은 추후 상세하게 기술한다).

 소프트웨어산업 육성 방안으로 ▲소프트웨어 인력을 올해의 5만2천명에서 5년 후에는 12만명으로 늘리고 ▲정부 및 공공기관에 대해 내년도 하드웨어 구입비 10%(17억원)를 소프트웨어 구입비로 사용토록 의무화하고 ▲내년 중 정부와 민간 참여기업이 각각 50억원씩 공동출자해 영세 소프트웨어 업체의 보증사업을 위한 공제사업을 도입키로 했다.

 1997년에 멀티미디어 콘텐츠지원센터를 설치하고 소프트웨어지원센터도 서울에 이어 4대 도시로 확대 설치키로 했다.

 정보통신 중소기업이 창업단계에서 자금 확보가 가능하도록 주문형반도체(ASIC)설계, 소프트웨어, 부품, 부가통신사업 등 분야별로 전문창업투자조합 결성을 추진하고 일단 기업화에 성공한 신생기업 중 매년 40~50개의 유망기업을 발굴해 자금, 판로, 기술개발 등을 집중 지원키로 했다.

 또한 정부와 기업, 대학이 협력체계를 구축, 초고속교환기와 차세대이동통신(플림스), 대형컴퓨터 및 디지털 방공기기 등의 공동개발에 주력하고 전문 중소기업의 ASIC, 고주파용 부품, 필터 등 부품개발도 적극 지원키로 했다.

 정부는 통합방송법이 제정되면 이 법에 따라 위성TV방송을 속히 허가하고 통합방송법 제정이 지연될 경우 관계부처와 협의해 현행법(전파법, 방송법)에 의한 허가를 조기에 추진키로 했다. 방송과 통신의 융합추세에 대한 대응책으로 통신과 방송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단일법령체계를 공보처(현 문화체육관광부)와 공동 모색키로 했다. 고선명TV방송은 2002년 본방송 실시를 목표로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실험방송에 들어가기로 했다.

 정보통신산업 해외진출 확대방안으로는 EDCF(대외경제협력기금)자금의 정보통신 분야 지원 과 해외 주재관 파견을 확대키로 했다.

 3년여간 대책안을 마련한 정홍식 실장의 말.

 “이 대책안에는 개성과 능력이 출중한 경상현·이석채·강봉균 장관 등 세 분의 미래상이 모두 포함됐습니다. 그런 만큼 한국 ICT산업 발전의 총괄지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보통신산업에 관한 기술개발과 제품, 서비스, 해외진출, 인력양성 등을 총망라했습니다. 이 작업에는 정통부의 모든 실·국장을 비롯해 실무자들이 총동원했습니다. 산업계와 학계, 통신개발연구원(현 정보통신정책연구원) 등도 이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정통부가 이 작업에 처음 착수한 것은 1995년 8월이었다. 그해 8월 4일 정보화촉진기본법에 제정되자 곧바로 정홍식 실장 주도로 추진위원회와 총괄반, 연구개발반, 표준화반, 기반조성반을 구성했다. 추진위원회는 정통부 임정재 기술심의관(한국통신기술협의회 사무총장 역임)과 류필계 정보정책과장(현 LG유플러스 부사장), 김원식 기술기획과장(현 법무법인 세종고문), 신용섭 연구개발과장(현 방통위 상임위원), 박정렬 기술기준과장(현 특허정보진흥센터 소장), 이해홍 정보통신진흥과장(현 한국LP가스공업협회 부회장), 최명선 주파수과장(현 KAIST 교수), 천창필 통신위성과장(경북체신청장 역임), 학계에서 박찬모 포항공대 교수(포스텍 총장, 대통령과기특보 역임), 이재홍 서울대 교수, 박승규 아주대 교수, 윤창번 통신개발연구원 실장(하나로텔레콤 회장 역임, 현 김앤장 고문) 등으로 구성했다.

 총괄반장은 김원식 과장이, 연구개발반은 신용섭 과장, 표준화반은 박정렬 과장, 기반조성반은 김원식 과장이 반장이었다. 이들 외에 정통부에서 김치동 서기관(현 지경부 기술표준원 지식산업표준국장)과 석제범 사무관(현 방통위 통신정책국장), 전영만 사무관(현 방통위 시장조사과장), 조을래 사무관(현 인천우체국장), 윤기태(현 안양우체국장), 홍완표 사무관(현 한세대 교수), 강성주 사무관(현 OECD대표부 파견), 오승곤 사무관(현 방통위 융합정책과장) 등도 대책반에서 활동했다. 정홍식 실장은 그해 9월 종합발전계획 수립을 위한 시안을 마련했다.

 1996년 9월 5일에는 기업활동지원대책팀, 제도지원대책팀, 기술 및 인력대책팀, 산업부문별대책팀 등 4개 실무 작업반을 구성했다.

 정홍식 실장아래 강상훈(청와대 정보통신비서관, 정보통신연구진흥원장 역임), 서영길(TU미디어 대표 역임, 현 IGM세계경영연구원 원장), 석호익 정책심의관(KT 부회장 역임, 현 한국통신기능기업협회장, 통일IT포럼 회장)과 임정재, 김창곤 기술심의관(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디지털케이블연구원장) 등이 차례로 핵심 역할을 했다. 과장급에서는 이성옥(현 한국플랜트산업협회 부회장), 공종렬(KMI 대표 역임), 이규태(한국IT비즈니스진흥협회 부회장), 형태근(방통위 상임위원 역임), 김호 과장(현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 부회장) 등이 참여했다.

 1996년 6월 20일 정통부 정책심의관으로 발령받아 이 작업에 참여했던 석호익 심의관은 ‘정보통신’이라는 용어에 이어 ‘주식매입선택권’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석호익 심의관의 회고.

 “제가 발령받아 왔더니 정홍식 실장 주도로 실·국이 총동원돼 대책안을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1996년 7월 1일 코스닥시장이 개장했고 이에 따라 스톡옵션 제도가 도입됐습니다. 문민정부 시절만 해도 대통령에 올리는 보고서에 외래어를 사용하지 않고 국어로 번역했습니다. 스톡옵션을 설명할 단어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고민하다 ‘주식매입선택권’이라고 표기하고 괄호 안에 스톡옵션이라고 썼습니다. 지금은 주식용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그 당시는 이런 용어가 없었습니다.”

 종합대책안은 실·국 업무에 따라 국가사회 정보화 촉진이나 초고속망 구축은 안병엽 정보화기획실장(정통부 장관 역임, 현 KAIST 석좌교수)과 이성해 통신지원국장(현 큐앤에스 회장) 중심으로, 정보통신기술 개발은 김창곤 기술심의관, 위성은 천조운 전파방송관리국장(작고) 중심으로 안을 만들었다. 해당 과장이나 사무관들도 이 작업에 매달렸다.

 종합대책안 마련은 강행군이었다. 장관부터 실무자까지 상하구분과 밤낮이 따로 없었다.

 당시 갓 결혼해 신혼이었던 정보통신정책실 산하 모 공무원의 일화 하나. 그는 어느 날 자정 무렵, 귀갓길에 나섰다가 정통부 인근에서 정홍식 실장을 만났다. 정 실장이 그를 보더니 “수고한다”며 소주를 한 잔 권했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 만드는 안은 내일 아침 7시까지 나한테 가지고 오시오.” 그는 소주잔을 놓자 사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밤샘 작업을 해 이튿날 7시 정 실장 앞에 서류를 갖다 놓았다. 그 당시 밤샘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정홍식 실장의 증언.

 “당시는 모두가 일 밖에 몰랐어요. 정통부 공무원들의 미래에 대한 신념과 열정, 노력 덕분에 종합대책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 대책안에 ICT강국을 향한 정통부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종합대책은 추진체계도 분명히 했다. 과제별로 실·국별 주무과를 지정하고 업무 협의부처까지 정해 책임을 떠넘기는 일이 없도록 했다. 종합대책은 정보통신산업의 단계 발전전략을 제시한 ICT강국의 완벽한 설계도였다. 대책안은 ICT 역사의 수레바퀴가 됐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