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사건_032] 대전 세계박람회(EXPO) 개최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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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대전에서 열린 세계박람회(EXPO)는 엑스포 역사상 최초로 개발도상국에서 개최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1928년 국제박람회기구 협약이 맺어진 후 선진국 대열에 끼지 못한 국가가 엑스포를 주최하거나 이런 나라에서 개최된 공인 엑스포는 전무했다.

[100대 사건_032] 대전 세계박람회(EXPO) 개최 <1993년 8월>
1993년 대전엑스포 한빛탑 광장에 모인 관람객 모습.
<1993년 대전엑스포 한빛탑 광장에 모인 관람객 모습.>

그간 개최국의 개최 빈도 수로 보면 근대 엑스포 역사는 서구 중심의 역사고, 선진국 주도의 역사였다. 국가별로 보면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첨단 과학기술이 앞선 유럽 및 미주 국가들이었다. 프랑스와 일본은 각각 7회와 3회씩 엑스포를 치르며 엑스포를 자국 발전에 적극 이용했다.

반면에 개도국의 엑스포 참여는 1958년 벨기에 브뤼셀 엑스포 때부터 급격하게 증가했으나, 위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엑스포에서 보조적인 참가국으로서 위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개도국 엑스포 개최 성공 모델=당시 국제박람회기구 총회에서 개도국들이 앞장서 대전엑스포 개최 공인에 적극적인 지원을 보냈던 것도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한국 엑스포를 통해 개도국의 자긍심과 개발 의지를 북돋우고, 다른 개도국들의 엑스포 개최를 기대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실제로 대전엑스포에는 중남미, 중동, 아프리카 등 개도국이 대거 참가해 엑스포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했고, 개도국 전반을 엑스포 주체로 부상시키는 계기가 됐다.

대전엑스포는 대규모 종합 박람회와 달리 중규모 전문 박람회 성격인 `인정 엑스포`를 시험적으로 개최해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의를 가진다. 전시 기간과 전시 면적을 제한해 참가국들의 비용을 절감하고, 국력 과시보다는 창의성에 중점을 두는 형태의 엑스포를 시도해 호응을 받았다.

당시 테드 앨런 국제박람회기구 의장은 “인정 엑스포 형태는 한국이 시험적으로 개최하게 돼 위험 부담을 안고 있었지만, 한국은 엑스포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경제 발전 정도가 유사한 국가들 대역에서 앞서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게 됐다”며 “한국은 똑같은 방법으로 발전하기를 희망하는 다른 국가들에 모델을 제시해줄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1993년 대전엑스포 개막식 장면
<1993년 대전엑스포 개막식 장면>

◇108개국서 1400만명 다녀가=대전엑스포는 1993년 8월 7일부터 11월 7일까지 93일간 대전에서 열렸다.

정부는 박람회를 위해 총 1조7180억원의 재원을 투자했다. 대전엑스포 직접 관련 사업인 회장 건설 등에 4000억원을 투자한 것 외에도 정부는 기반시설 확충 사업에 2000억원, 고속도로 확장 등 주변 여건 조성 사업에 7000억원을 쏟아부었다. 국내외 전시 참가자들도 전시관 건설에 모두 3000억원을 투자했다.

`새로운 도약에의 길`을 주제로 한 대전엑스포에는 108개 국가 38개 국제기구에서 참가했고, 관람객 수만 1400만여명에 달했다.

이 행사에서 우리나라는 과학기술, 경제, 문화, 환경, 지역 발전 등 여러 분야에서 긍정적인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됐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대전엑스포를 통해 생산 유발액 3조643억원, 소득 유발액 1조2500억원, 고용창출 효과 21만2000명 등 경제적 효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했다. 또 수입 유발액은 4455억원으로, 국제 수지 개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엑스포 회장을 찾는 외국 바이어 및 업계 인사들에게 수출 한국의 미래상을 제시함으로써 수출을 증대시키는 한편 첨단 산업의 발전을 촉진해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경제발전의 단계를 높이는 계기가 됐다.

대전엑스포는 세계 박람회 사상 가장 뛰어난 정보화 엑스포로 평가받았다.

당시 행사장은 첨단 과학행사에 걸맞게 회장 운영, 전시관 및 행사 안내, 교통 숙박 정보, 입장 관리, 교통 상황 등 엑스포 주요 상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할 수 있는 컴퓨터 시스템이 구축됐다. 조직위원회는 엑스포 전 기간에 걸쳐 이러한 첨단 시스템을 활용해 전시관 예약, 안내에서부터 미아 찾기에 이르기까지 참가자와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했다.

엑스포 전산 시스템 `모아드림`은 엑스포의 신경망 역할을 담당했다.

이에 힘입어 대전엑스포는 상황관리 전산 시스템과 유선 텔레비전을 설치해 혼잡한 상황에서도 신속하고 정확하게 위기 관리를 할 수 있었다.

대전엑스포는 과학기술 대중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다양한 체험 전시관을 통해 국민에게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머지않아 실용화될 첨단 기술 제품을 미리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단지 전시물을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직접 기기를 다루거나 실습함으로써 원리와 작동법을 이해하게 하고, 컴퓨터가 만든 가상 현실 시스템을 직접 시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최첨단 과학교육의 장으로 거듭났다.

소음과 공해가 없고 교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첨단 미래 교통수단인 자기부상열차, 전기 자동차, 태양전지 자동차, 태양전지 거북선 등은 우리 자체 과학기술로 개발해 관람객들에게 차세대 교통수단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엑스포가 수도권이 아닌 대전 지역에서 열렸다는 사실 자체도 의미가 있다. 첨단 과학기술, 신 에너지 개발, 환경보존 기술 등 21세기를 주도할 내용으로 구성된 엑스포를 대전에서 개최함으로써 기존 서울 중심 발전 구조에서 지방 분산 발전의 계기가 됐다.

이로써 대전은 새로운 수요 창출과 도시 기반 정비, 시민의식 향상 등 눈에 보이는 변화와 함께 과학기술 분야의 성장 잠재력을 갖춘 도시로 거듭나게 됐다.

특히 대전엑스포를 통해 대전시는 최소한 10년 정도 지역 발전을 앞당기게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도로 개설 및 확·포장 사업과 상하수도 시설, 하천 정비 등 도시 기반시설이 크게 확충됐고, 시가지 노화 사업을 포함한 생활환경 정비 사업도 대폭 이뤄졌다. 대전시 연평균 지역 개발비가 1500억원인 데 비해 그 10배가 넘는 돈이 대전엑스포를 전후해 3년간 집중 투입됐다. 그 결과 도로 등 도시 기반 시설이 대폭 확대됐고, 도시 환경은 전면 정비됐으며 국제적인 행사를 치름으로써 시민 의식도 한 차원 높아졌다.

◇대전엑스포 사후처리로 과학공원 조성=정부는 대전엑스포 사후 처리와 관련해 회장 시설을 철저하고 제한된 시설만을 유지하거나 상징적 의미의 기념 공원 조성에 그친 역대 엑스포와는 달리 계획 단계에서부터 회장을 재활용한다는 방침 아래 효율적인 사후처리 방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당시 대전세계박람회조직위원회는 역대 엑스포의 사례 분석을 토대로 박람회장을 영구적인 성격을 지닌 유희 시설과 과학시설의 혼합형태(EPCOT)로 과학공원을 조성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고 대덕연구단지 전체를 과학공원으로 조성한다는 안을 모색했다.

조직위원회는 이후 수 차례 검토를 거쳐 19만1000여평에 달하는 상설전시구역의 16개 상설 전시관과 자기부상열차 등 제반 시설물을 계속 활용해 국민 과학기술 문화 교육장으로 기능할 주제공원을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또 국제전시구역 임시 시설물은 행사 후 철거하고, 상하수도 전기통신 설비 및 조경 등 기반 시설을 최대한 활용해 대덕연구단지의 테크노폴리스로서의 기능을 보완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1단계로 1994년까지 엑스포과학공원을 조성하고, 1996년까지 국제전시구역의 임시시설 철거와 민자 시설 추가 유치를 완료하기로 했다.

조직위는 이러한 계획에 입각해 엑스포과학공원이 정부 재정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기로 결정하고, 1993년 12월 비영리 공익 법인인 `대전엑스포기념재단`을 설립해 엑스포과학공원을 소유 관리하도록 했다.

◇엑스포 정신 계승 한계 및 향후 과제=올해는 대전엑스포가 개최된 지 만 19년째 되는 해다. 당시 3개월에 걸친 박람회는 한국 역사에 큰 획을 긋는 박람회로 남았지만, 하드웨어인 엑스포과학공원을 통해 당시 대전엑스포 정신을 대대로 계승하려던 당시 정부의 계획은 실패했다.

엑스포가 끝난 후 남은 재원 900억여원과 시설물을 기반으로 이를 주관하는 기념재단이 만들어졌고, 재단은 민간에 경영을 위탁해 1998년까지 엑스포과학공원을 관리했다.

하지만, 엑스포과학공원은 행사 종료 후 콘텐츠 부족과 지역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바로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엑스포기념재단은 민간 업체와 소송에 휘말려 전체 기금 중에서 300억원을 배상해 줬고, 이후 대전시가 운영권을 인수해 1999년부터 지방공사 대전엑스포과학공원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지방공사도 적자운영을 피할 수 없었다. 매년 40억~50억원의 적자를 면하지 못한데다 기획력도 부족해 과학공원 활성화의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했다. 과학공원의 각종 시설물이나 전시관 등은 지속적으로 유지 보수가 이뤄지지 않아 흉물스럽게 변했고,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10년 넘게 대전시가 엑스포 재창조를 내세우며 민간 및 중앙부처와 연계한 대형 사업을 구상했지만 실현된 것은 없다.

그나마 고무적인 것은 대전시가 최근 롯데월드, 롯데쇼핑과 손잡고 엑스포과학공원을 복합테마파크로 조성하기로 양해각서(MOU)를 교환하면서 공원 활성화 전기가 마련됐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역시 끝까지 가봐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전에도 수 차례 MOU만 교환해놓고 무산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사 엑스포과학공원을 복합테마파크로 조성한다 해도 문제는 남아 있다. 현재 롯데월드 측 계획대로라면 엑스포과학공원에는 테마파크와 워터파크, 문화수익 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93 대전엑스포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첨단과학교육의 장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채훈 대전마케팅공사 사장은 “선진국과 달리 우리 정부가 하드웨어로 엑스포정신을 계승하려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며 “이러한 전철을 되밟지 않기 위해 현재 열리고 있는 여수 엑스포도 효율적인 사후 시설 관리 방안을 서둘러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표] 1993년 대전 엑스포 관련 통계

(자료 : 산업연구원)


대전=신선미기자 smsh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