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주민번호수집금지 빠른 게 능사 아냐

다음달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안을 시행하면 통신사와 유료방송사업자가 범법자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법 시행과 더불어 범법자를 양산한다니 뭔가 잘 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법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이야기다.

사업자가 고객을 유치할 때 주민번호 수집을 금지하는 것이 개정안 골자다. 오프라인 대리점 등에서 고객을 모은 통신사업자와 유료방송사업자는 고객 식별 수단이 마땅치 않아 발을 동동 구른다. 정부는 대안으로 온라인상 개인식별번호인 ‘아이핀’과 흡사한 ‘마이핀’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 세부 정책이 법 시행을 코앞에 두고 나오면서 업계 불만이 폭발했다. 전산 시스템과 데이터베이스(DB) 재구축에 길게 6개월 이상 걸리는 현실을 전혀 감안하지 않은 처사라는 것이다.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는 문제가 불거지자 ‘마이핀’은 식별수단 가운데 하나라면 한발 물러섰다. 그 대신 생년월일, 계좌번호 등을 다른 식별수단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오히려 더 현실을 무시한 탁상행정이라는 성토가 나왔다. 생년월일이 같은 고객이 많은 데다, 계좌번호도 금융사가 고객과 일치 여부를 확인해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주민번호 수집을 예외로 인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예외를 두기 시작하면 다른 곳에서도 들불처럼 일어나 형평성 논란이 생긴다. 당초 주민번호 수집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개인정보유출을 막겠다는 법 취지도 무색해진다.

아무래도 개인정보를 담지 않은 13자리 무작위 번호인 ‘마이핀’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조금의 유예기간을 달라는 업계의 목소리에 정부가 귀를 기울여 볼만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스템 구축 시간만이라도 여유를 줘야 한다.

잇따른 개인정보유출 사건에 하루라도 빨리 주민번호수집을 금지하려는 정부 입장을 이해한다. 하지만 준비가 안 돼 범법자 양산이 불 보듯 뻔한데 밀어붙이는 것은 책임 있는 당국자 모습이 아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안이 진짜 실효를 거두려면 조금 더 늦더라도 제대로 준비해 시행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