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192> 사상 첫 파워포인트 업무보고

정보통신부의 대통령 업무보고는 디지털 충격, 그 자체였다. 그동안 문서로 하던 대통령 업무보고에 파워포인트가 등장한 일은 건국 이래 처음이었다. 대통령 업무보고 형식 파괴의 예고편이었다.

2003년 3월 28일 오전 10시.

청와대 본관 2층 세종실에서 열린 정통부의 대통령 업무보고에서는 긴장감 대신 탄성이 연달아 터졌다. 디지털 대통령을 표방한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만족한 표정이었다. 전면의 스크린을 주시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든다는 표시였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서술형 문서 대신 요점 중심의 파워포인트가 첫선을 보였다는 점이다. 아날로그라는 구각(舊殼) 대신 디지털이 등장한 것이다. 핵심 내용만 보고하니 쉽게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그림과 도표로 표시해 시각(視覺) 효과도 만점이었다. 다른 이유는 일하는 방식의 변화였다. 즉, 기업식 업무보고였다. 추진 정책성과를 수치로 제시했다. 얼마를 투자해 언제까지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두겠다는 목표를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동안 정부가 투자한 사업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도 그 성과를 예측하지 못했던 사례와는 사뭇 달랐다. 이런 보고는 정부에서 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형식이었다.

노 대통령은 진대제 정통부 장관(현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회장)의 업무보고가 끝나자 크게 만족했다.

“아주 좋습니다. 준비하느라 수고 많이 했고요. 다른 부처도 업무보고를 정통부만큼만 해주세요.”

대통령의 이 발언은 각 부처 업무보고 풍속도를 바꾸게 만들었다. 그 진원지가 정통부였다. 정통부 다음 보고 일정이 잡힌 부처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정통부 보고 자료를 구했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당장 파워포인트를 사용할 공무원이 없었다. 파워포인트 보고가 아침밥 짓듯이 금세 되는 일이 아닌 까닭에 “정통부 때문에 이게 무슨 난리냐”며 정통부에 원망의 눈흘김도 없지 않았다.

이날 정통부의 대통령 업무보고는 대통령 입장과 국민의례, 진대제 장관의 인사말, 정통부 간부소개, 업무보고, 토론 순으로 진행했다.

업무보고는 노준형 정보통신정책국장(정통부 장관 역임, 현 김앤장 고문)이 했다. 변재일 기획관리실장(현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이 차관으로 승진해 기획관리실장이 공석이었다.

정통부는 이날 3대 기본 정책방향으로 △지식정보화의 전면화로 국민 참여사회 구현 △IT를 통해 변화와 개혁 촉진 △미래 성장동력으로 IT 신산업 창출을 보고했다.

정통부는 IT사업 신성장동력 발굴과 혁신적인 전자정부 구현을 당면과제로 정하고 주요 추진과제로 IT중소·벤처기업 경쟁력 강화와 인터넷 침해사고 대응 정보통신망 보호대책을 쟁점 현안과제로 3세대 이동통신 서비스 도입과 인터넷 역기능 해소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통부는 2007년 IT 생산 400조원과 수출 1000억달러를 달성해 IT산업의 국민경제 기여도를 획기적으로 높이겠다고 밝혔다.

정통부는 이어 앞으로 5~10년간 우리나라를 먹여 살릴 ‘신성장동력’으로 디지털기기 분야에서는 △3세대 이동통신 △디지털TV △포스트PC △지능형 로봇을, IT 자체를 향상시킬 수 있는 부품 분야에서는 메모리와 시스템온칩(SoC) 등 신개념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소프트웨어 및 콘텐츠 분야에서는 디지털콘텐츠, 임베디드소프트웨어, 텔레매틱스 등을 각각 선정했다고 보고했다.

9개 신성장동력 분야 발전을 위해 기술선도형 플래그십 프로젝트로서 포스트PC 시대에 대비한 융·복합 기기 및 관련부품, IT 결정체인 지능형 로봇 등에 기술개발과 산업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정통부는 또 디지털TV 전국망을 2005년 완성하고 DMB 서비스와 3세대 이동통신 서비스를 연내 도입하는 한편 관련 기술개발에 2007년까지 1조6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이 밖에 IT산업 국제경쟁력 강화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국가 연구개발(R&D) 시스템을 정비하고 국가 IR 활동을 강화해 수출 확대와 외국기업 R&D 연구소 국내유치를 추진하기로 했다.

진 장관은 이날 기술선도형 프로젝트 추진을 위해 정통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고 관계부처와 산학연 전문가들로 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사업관리단장은 민간전문가에게 맡기겠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가 대형 연구과제를 집중관리하기 위해 도입한 정통부 PM(Projet Manager) 제도의 시발점이다. 먹을거리 개발을 위해 분야별 전문가를 채용하겠다는 진 장관의 구상이었다(PM제는 추후 소개한다).

정통부는 이날 총 72개의 화면을 준비했다. 이 가운데 업무보고 자료는 46개였다. 나머지 26개는 참고자료였다.

업무보고가 끝나자 진대제 장관이 “정통부 업무보고 내용에 대한 질문을 받겠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이 보고 내용에 대해 질문했다. 그런데 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답변 내용이 화면에 나타나는 게 아닌가. 정통부가 사전에 예상질문 답변을 백업자료로 준비해 놓았던 것이다.

진대제 장관의 증언.

“대통령 업무보고 자료를 만들면서 사전에 실·국별로 예상질문을 받아 답변서를 만들었습니다. 그 자료를 백업 슬라이드에 넣어두었다가 질문을 하면 즉시 답변이 스크린에 나타나도록 했습니다. 다른 부처는 말로 길게 설명했는데 우리는 그럴 필요 없이 화면에 그림과 도표로 일목요연하게 답변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보충설명 외에 길게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참석자들이 다른 부처에 비해 월등히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사전에 준비를 한 관계로 예상을 벗어난 질문은 없었습니다.”

노 대통령도 자신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답변내용이 화면에 나오자 “어? 답변 내용이 벌써 화면에 떴네”라며 감탄했다.

이날 정세균 의원(산자부 장관 역임, 현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과 김효석 의원(16·17·18대 국회의원), 박기영 국과위 수석간사(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 역임, 현 순천대 교수) 등이 전자정부와 SW 육성방안·정보보안 등에 관해 질문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보고회에서 “지능형 로봇이나 내장형 소프트웨어(SW) 등 IT 분야 중 아직 미개척 분야가 많고 기존 IT산업 중에서도 아직 개발할 분야가 많으므로 성장 잠재력을 확인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켜 나가달라”고 당부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IT산업이 앞으로 성장엔진으로 발전하려면 핵심기술 연구개발과 인력양성에 역점을 둬야 한다”며 “IT 분야를 포함한 과학기술 인력 전반에 대해 관계 부처 및 전문가와 좀 더 깊이 있는 토론을 해 달라”고 주문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정통부에 “정말 잘한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통령의 칭찬은 정통부 공직자들에게 신명나는 일춤을 추게 했다.

그러나 사상 첫 파워포인트 업무보고를 준비하기까지 정통부는 내부적으로 엄청난 몸살을 앓았다.

진대제 장관의 말.

“삼성전자에서도 저는 파워포인트를 잘하는 고수(高手)에 속했습니다. 파워포인트는 HP 등 외국기업의 경영자를 설득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습니다. 학회 등에서도 발표할 자료는 모두 직접 파워포인트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파워포인트를 잘하게 된 것입니다.”

진 장관이 취임 후 대통령 업무보고를 파워포인트로 하라고 지시하자 정통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익숙함과의 이별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진 장관은 이 분야 최고 전문가였다. 정통부 관계자들은 삼성전자로 냅다 달려갔다고 한다. 진 장관이 사장시절 어떻게 파워포인트를 사용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김창곤 당시 정보화기획실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디지털케이블연구원장)의 회고.

“실무자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파워포인트로 대통령 업무보고 자료를 만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일에 대한 진 장관의 집중력과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진 장관은 최종 순간까지 내용을 검토하고 수시로 바꾸었습니다. 최고를 위한 최선의 노력이죠. 대통령 보고가 끝나기 전에는 일이 끝난 게 아닙니다.”

노준형 국장의 증언.

“대통령 보고는 부처의 가장 큰 행사입니다. 매년 하는 일이므로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 장관 취임 후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해보지 않은 파워포인트로 보고 자료를 만들라는 지시를 했으니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당시 기획관리실장이 공석이어서 내가 준비를 했는데 장관실에서 날마다 회의를 했습니다. 청와대 보고 당일 가장 힘들었던 게 시간을 맞추는 일이었습니다. 보고 시간이 20분간으로 정해졌는데 사전 리허설을 했지만 이를 정확히 맞추는 게 어려웠습니다. 당시 파워포인트는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정부부처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정통부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고생 끝에 파워포인트로 보고서 초안을 만들었다. 하지만 진 장관의 마음에 들 리 만무했다. 진 징관은 장관실에 스크린과 컴퓨터 등을 설치해 놓고 하나하나 내용을 점검했다. 그리고 수없이 내용을 가다듬었다.

진 장관의 이어진 증언.

“보고 내용을 다 직접 정리했습니다. 매일 장관실에 모여 회의를 하면서 보고자료를 만들었습니다. 제목을 직접 달고 글씨와 도표, 애니메이션도 다 결정했습니다. 마무리만 전문업체에서 했습니다.”

정통부는 파워포인트 보고계획을 사전에 청와대에 보고했다. 청와대는 흔쾌히 수락했다.

노력한 대가는 대통령의 극찬으로 나왔다. 정통부는 이후 노 대통령의 주목을 받았다. 정통부가 노 대통령이 추구하는 개혁과 혁신의 아이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햇볕이 밝으면 그늘도 짙은 법. 정통부를 향한 시샘의 바람이 시나브로 불기 시작했다.

IT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