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수 칼럼]사내유보금을 벤처투자에 쓰자

[신화수 칼럼]사내유보금을 벤처투자에 쓰자

한쪽은 차고 넘친다. 다른 한쪽은 텅 비었다. 2014년 대기업과 중소기업 곳간 사정이다. 10대 그룹 사내유보금(이익잉여금)이 6월 기준 477조원이다. 정부 예산보다 120조원이 더 많다. 삼성전자, 현대차를 비롯한 대기업 차지다. 중소기업은 유보금이라는 말조차 잊고 산지 오래다.

이익에서 배당하고 남은 사내유보금은 미래에 쓰려고 남긴 재원이다. 대기업이 이를 제대로 쓰지 않자 최경환 경제팀이 ‘과세’라는 칼을 꺼냈다. 재계가 반발했다. 정부는 기존 사내유보금 제외로 한발 물러섰다. 법인세 인하 수준의 과세율도 거론했다. 과세 방침에 변함은 없다. ‘기업소득환류세제’는 분명 새 이름인데 13년 전 없앤 ‘적정보유초과소득 법인세 과세’를 빼닮았다.

기업이 돈을 써야 과실이 가계와 경제·사회로 흘러간다. 정부는 이 ‘낙수효과’를 노려 그간 법인세 인하 등 기업친화 정책을 펴왔다. 정작 기업이 지갑을 닫자 강수를 뒀다. 재계도 일부 인정한다. 취지도 이해한다. 하지만 꼭 과세여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정부는 이번에 근로소득과 배당소득 증대세제도 함께 내놨다. 기업 사내유보금을 임금, 배당 확대에 쓰라는 메시지다. 그런데 임금 인상은 이익을 많이 낸 극히 일부 대기업이나 가능하다. 배당 확대 혜택은 해외 투자자, 오너 일가, 고소득 자산가에게 쏠린다. 가계 소득 확대 효과가 이렇게 제한적일 바엔 차라리 혜택이 온 국민에게 갈 법인세 인상이 더 낫겠다.

정부가 정녕 사내유보금에 과세를 하겠다면 투자 유도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다고 기업 특성을 무시하고 일률적 투자를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이다. 패널티보다 더 큰 끌릴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투자라고 하면 공장, 설비, 연구개발(R&D)을 떠올린다. 인수합병(M&A)을 투자로 여기지 않는다. 외국엔 M&A 투자가 활발하다. 특히 미래를 준비하는 기술기업이 가장 열성적이다. 이것 없이 빠른 기술과 시장 변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국내 대기업은 M&A에 부정적이다. 거의 거부감 수준이다. 인수할 기업이 있어도 이상한 행동만 한다. 제값을 주고 살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작은 기업이라면 거저먹으려 한다. ‘핵심 직원 몇 명 빼오면 될 걸. 뭐 하러 인수해?’ 대기업의 ‘아주 오래된’ 생각이다. 이 그릇된 인식과 풍토를 빨리 바꾸지 않으면 대기업의 미래 먹거리 찾기뿐만 아니라 창조경제 동력인 벤처 생태계 구축도 요원하다.

만약 중소·벤처기업 M&A에 적극적인 대기업에게 사내유보금 과세를 아예 하지 않거나 더 큰 인센티브를 주면 어떨까. 이를테면 영업권 과세 면제다. 서울행정법원도 최근 손을 들어준 마당이다. 영업권을 합병차익으로 보고 동부하이텍에 법인세를 매긴 국세청에 취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면 뭐해, 인수할 기업이 없는데.’라는 반문도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대기업이 해외만 바라보는 사이 외국 대기업, 특히 기술기업은 한국의 알찬 벤처기업 쇼핑에 한창이다. 벤처기업도 국내 대기업보다 외국기업과의 협업을 더 바란다. 갓 나온 스타트업마저 이렇다. 벤처 생태계에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대기업이다. 이들을 변하게 만들어야 한다. “투자를 안 하고 싶은 기업은 없다”고 강변하는 재계다. 변신할 기회를 줘야 한다. M&A를 연계한 사내유보금 과세는 좋은 ‘당근’과 ‘채찍’이다.

신화수 논설실장 hssh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