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중소기업 기술 빼앗기에 관용 없다

대기업으로부터 기술 개발을 도와달라는 연락이 온다. 이런 저런 도움을 준다. 납품이나 공동 개발 기대감이 커질 즈음 연락이 뚝 끊긴다. 알아보니 하지 않기로 했다는 답이 온다. 공들인 시간과 노력을 한 푼도 보상받지 못해 울화가 치밀어도 어쩔 수 없다. 나중에 보니 그 대기업은 베낀 기술을 버젓이 쓴다.

대기업과 기술 협력을 해 본 중소기업 경영자들이 곧잘 드는 사례다. 일부 왜곡하거나 부풀린 주장도 있지만 폭넓은 공감을 얻는다. 그만큼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교묘하게 빼앗거나 악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방증이다. ‘소송하면 될 것 아니냐’는 반문은 현실을 모르는 얘기다. 대기업과 싸우는 것 자체가 ‘달걀로 바위치기’다. 해당 대기업은 물론이고 다른 대기업과의 거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어 속으로 끙끙 앓아야 한다.

답답한 심정을 알았는지 공정거래위원회가 하도급법 상 ‘기술자료 제공 요구·유용행위’ 심사지침을 더욱 엄격하게 개정해 29일 시행한다. 원 사업자가 수급사업자에게 지술자료를 요구할 경우를 종전 9가지에서 4가지로 제한했다. 경영노하우 지도 과정, 거래여부 개시 결정, 허가 신고 시와 같이 불필요하게 기술 자료를 요구하는 경우를 삭제했다. 또 제공 시에 정당한 대가를 받도록 하며, 제공 범위도 사전 협의한 것으로 한정했다.

공정위가 새 심사지침을 엄격히 적용하면 시도 때도 없이 기술 자료를 요구하는 관행은 많이 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갑’의 요구를 무작정 거절하기 어려운 풍토다. 대기업이 바뀌지 않는 한 눈에 보이지 않게 기술을 빼내는 행위는 사라지지 않는다.

공정위가 나선 것으로 확인됐듯이 이 문제에 관한 한 대기업 자정에 기댈 때는 이미 지났다. 중소기업도 이제 권리 침해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 소송도 불사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소기업은 이를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로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외로운 싸움을 하지 않는다. 스스로 지키지 않는 권리를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