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제자리맴도는 차세대 전력반도체사업

지난 2011년 정부는 10대 생태계 발전형 신성장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중소기업에 적합하고 일자리 창출, 창업 가능성, 글로벌 경쟁력 확보 등 ‘미래 가치’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는 설명이 곁들여졌다. 여기에는 ‘에너지 절약형 전력반도체’도 포함됐다. 메모리 일변도의 우리 반도체 산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동시에 자동차·에너지 분야 신수요를 발굴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이 사업은 3년이 지난 지금도 추진동력을 얻지 못하고 기획 단계에 머물고 있다. 반쪽짜리 반도체 강국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는 기회가 ‘골든타임’을 놓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정부는 10대 신성장프로젝트 확정 후 이듬해인 2012년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를 중심으로 ‘고효율 전력·에너지 반도체 기술개발’ 사업을 추진했다. 8년간 국비 1755억원을 포함해 총사업비 3230억원을 투입하는 대규모 사업이다. 당시 심화되는 전력난 해결에 기여하고 메모리에 비해 미흡한 시스템반도체 분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원천·상용화 기술 개발, 인력 양성, 국제협력 지원 등이 포함됐다. 지경부는 이 사업을 그해 하반기 예비타당성 조사 신청사업으로 확정하고 추진했으나 사전 기술성 심의 단계에서 고배를 마셨다.

다음해인 2013년에는 새 정부 출범으로 이름을 바꾼 산업통상자원부가 바통을 이어받아 비슷한 사업을 추진했다. 이 사업은 예비타당성 본 심사까지 올라갔으나 최종 통과에 실패했다. 기획안이 현재 시장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실리콘 계열 전력반도체 중심으로 짜인 것이 단점으로 지적됐다.

지난해 사업 추진 과정에 정통한 업계 전문가는 “중장기 대형 R&D 사업인만큼 이미 시장 경쟁이 치열한 품목이 아니라 향후 미래 시장을 염두에 둔 선제적인 기술 개발에 대한 요구가 높았다”고 전했다.

이에 산업부는 기존 실리콘 소재가 아닌 화합물에 기반한 차세대 전력반도체 중심으로 기획안을 전면 수정했다. TI, 인피니언 등 해외 반도체 기업이 주도하는 실리콘 기반의 전력반도체가 아닌 새로 부상할 화합물 전력반도체 시장 선점을 목표로 정했다.

화합물 전력반도체는 어느 나라도 시장을 열지 못한 미개척 분야로 성장 잠재력이 높은 분야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발 앞서 상용화 기술을 개발하면 시장 선점 효과가 상당히 클 것으로 기대됐다. 산업부는 산업 생태계 조성 차원에서 시제품 제작, 창업보육 등 기반 구축 사업도 함께 연계했다.

하지만 올해 결과는 지난해보다 더 낮은 성적표로 돌아왔다. 산업부가 기획재정부에 차세대 전력반도체사업 예비타당성 조사를 신청했지만 본 심사 진출 여부를 가리는 단계에서 보류됐다. 지난해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한 번 탈락한 사업인데다 향후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등의 이유가 더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차세대 전력반도체 R&D 사업에 많은 기대를 걸었던 업계는 허탈하다는 반응이다. 지난해는 시장이 가시화된 실리콘 반도체는 중장기 투자 필요성이 적다는 이유로, 올해는 향후 급성장이 예상되는 화합물 반도체는 아직 시장이 구체화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업화가 차단되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진 탓이다.

사업 기획에 참여했던 관계자는 “눈에 보이는 기술은 가치가 낮다고 지적하고, 미래 기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되는 현실”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예비타당성 조사 과정에서 미래 가치를 보다 심도 깊게 들여다봐야 한다는 뜻이다.

정부가 전력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반응도 나왔다. 전기차나 지능형 자동차 산업이 커질 것은 알면서 정작 핵심 부품인 전력반도체 국산화에는 소홀하다는 지적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연구개발지원본부장은 “우리나라가 세계 TV시장 1위를 차지한 가장 큰 이유는 디스플레이를 자체 개발·생산했기 때문”이라며 “결국 핵심 부품·소재를 국산화해야 세트 산업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데 외산을 사다 쓰면 된다고 생각하니 부품 국산화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업을 준비한 산업부도 더 치밀한 검토와 사업 기획이 요구된다. 예비타당성 조사를 한번에 통과하는 대형 R&D 사업이 흔치 않다는 현실을 감안해도 ‘삼수’를 넘어 ‘사수’째로 접어든 것은 향후 보완이 필요하다. 무조건 사업 범위를 넓히는 것에 매달리지 말고 실제 수요와 연계 가능한 부분을 구체화하는 등 명확한 타깃을 설정하고, 그에 맞는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m, 배옥진기자 witho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