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천리마와 파리

[데스크라인]천리마와 파리

‘파리가 준마 꼬리에 붙어 하루 천 리를 간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노관’을 이렇게 묘사했다. 노관은 중국 한나라 개국 공신이다. 한고조 유방과 같은 동네에서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났다. 동갑이지만 유방을 상전으로 모셨다. 덕분에 시골 건달에 불과했던 그는 연나라 왕위까지 올랐다. 보잘것없는 인물도 걸출한 영웅을 만나면 운명이 달라지는 법이다.

워싱턴포스트가 페이스북에 모든 기사를 공급하기로 했다. 페이스북이 올 5월에 선보인 ‘인스턴트 아티클(Instant Articles)’에 하루 1200여꼭지 기사를 제공한다. 인스턴트 아티클은 ‘네이버뉴스’와 흡사한 서비스다. 기사 링크를 누르면 언론사 홈페이지로 연결되는 대신에 페이스북 화면에서 바로 기사를 볼 수 있다. 기사를 불러오는 속도가 빨라졌다. 페이스북은 이용자가 언론사 사이트로 이탈하지 않게 이 서비스를 고안했다.

뉴욕타임스, 허핑턴포스트 등 유력 매체도 인스턴트 아티클에 기사를 공급 중이다. 하지만 하루 30~40건에 불과하다. 뉴스 유통 권한을 페이스북에 넘길 수 없다는 속내가 깔려 있다. 워싱턴포스트가 그런 암묵적 카르텔을 깼다. 자체 뉴스 플랫폼을 두고 ‘페이스북’이라는 준마에 올라탔다.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한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가 던진 승부수로 보인다. 베조스는 ‘빠른 성장(Get Big Fast) 전략’으로 지금의 아마존을 만들었다. 워싱턴포스트도 온라인 독자부터 많이 확보하자는 데 방점을 찍은 셈이다.

‘워터게이트’ 특종으로 유명한 워싱턴포스트는 뉴욕타임스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유력지다. 그런 유력지가 자존심을 꺾고 페이스북과 한 몸이 된 건 미디어 산업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콘텐츠 생산과 유통, 수익모델 등 전통 비즈니스 모델의 대수술이 불가피할 것이다. 페이스북은 ‘인스턴트 아티클’ 페이지 편집권과 광고 영업권을 신문사에 넘겼다. 일종의 당근이다. 10억명이 넘는 페이스북 이용자를 활용하면 비즈니스에 날개를 달 수 있다. 워싱턴포스트가 페이스북에 베팅하는 이유다. 워싱턴포스트 전략이 성공하면 주저하던 다른 미디어도 페이스북에 밀물처럼 합류할 것이다.

미디어 산업만의 이슈는 아니다. 페이스북 인스턴트 아티클 서비스가 머지않아 한국에도 상륙할 것이다. 네이버, 카카오 등 포털업체가 장악한 뉴스 유통권력이 흔들릴 수 있다. 광고 영업권을 뉴스 미디어에 넘긴 페이스북 정책이 너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네이버나 카카오가 긴장해야 할 대목이다.

우려되는 점 역시 많다. 뉴스 유통권력을 지닌 페이스북 전횡이 가장 두렵다. 페이스북에 잘 보이는 미디어가 급부상하는가 하면 반대로 몰락할 수도 있다. 기사가 상품이 되고 ‘클릭 전쟁’이 격화될 게 뻔하다. 상업주의에 저널리즘은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

천리마에 올라 탄 파리는 결정권이 없다. 천리마가 향하는 곳으로 끌려 갈 수밖에 없다. ‘행운아’ 노관도 말년에 한고조에게 숙청당할 수 있다는 위협을 느꼈다. 결국 먼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나라 군대에 처참하게 패한 뒤 흉노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천리마는 한 번 올라타면 내려오기 힘들다. 준마 꼬리에 붙어 천 리를 갈 것인가, 아니면 전통적인 미디어로 남을 것인가. 신문업계의 고민이 깊다.

장지영 정보통신방송부장 jyaj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