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yce의 세상물정 영어] Solitude – 고독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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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ce의 세상물정 영어] Solitude – 고독을 부른다

Solitude, 낭만적인 단어이다. 이 단어가 주는 느낌, 왠지 옷깃이라도 세우고 낙엽이라도 밟아야 할 것 같다. 한편으로는 진부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낭만적(romantic)’이라는 말이 solitude와 함께 당연히 떠올라야만 하나? 그런데, 그러하다. 낭만적’이라는 표현은 solitude라는 단어와 떼어놓을 수 없다. solitude라는 단어의 연원이 그렇다. 낭만주의 (Romanticism) 시대가 되어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단어이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개인적인 감정의 서사를 표현하는 데에 치우쳐서 사용되는 ‘낭만’은 낭만주의 시대에 말하던 ‘낭만’이 아니다. Solitude란 단어에 묻어있는 서구의 가치, 그 가치를 배태한 인간의 역사를 볼 수 있다고 하면 과장일까.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 따르면 solitude라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거의 그대로 들어온 단어로, 14세기 중반 불어를 통해 영어로 들어왔으나 17세기까지는 영국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이 단어가 부상한 때는 18세기 말로 낭만주의가 영국에서 발현하는 시기이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낭만’과 ‘고독’이 오늘날의 ‘인기 검색어’ 마냥 시대의 단어로 부상을 한 것일까.

낭만주의 이전의 시대가 바로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이다. 사람들이 모두 이성적이었던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중요하다고 여겨지던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은 더 나아가 이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비이성적인 것들 – 감정, 직관, 영감(inspiration) 등을 두려워하고 억압했다. 그래서 이성의 시대에는 당시 작가들을 포함한 웬만한 예술가들은 한번씩은 정신병원(Asylum)에 수용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기도 했다.

고독, 신을 거스르는 것

17세기에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solitude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고독을 즐기는 자는 누구든 간에 야수이거나 신이다. (Whosoever is delighted with solitude is either a wild beast or a god.)” (<에세이>17, ‘우정에 관하여’ 중) 즉, solitude가 인간에게 있어서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상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프랑스에서 40명의 학자가 매달려 40년이 되도록 완성하지 못한 사전 집필을 홀로 8년만에 해내면서 영국 역사상 최고의 지성인 (man of letters)이라는 호칭으로 불렸고, 20세기 초 옥스포드 사전이 등장하기 까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사전의 집필자였던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은 자신의 정기간행물, <램블러(Rambler)> 138호에서 이렇게 말한바 있다. “고독에 굴복하면, 그 교활한 적이 인간을 선행으로부터 분리시킬 공산이 높다. (You subject yourself to solitariness, the sly enemy that doth most separate a man from well-doing.)”

고독에 대한 이 부정적인 시선들은 기실 기독교의 오랜 전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라는 창세기 말씀부터 시작해서, 중세에 유럽에 정착된 가부장 기독교는 사람을 하나님 앞에선 ‘백성(nation)’이라는 ‘집단’으로 인식하는 가치관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가치관에는 ‘존재의 사슬(Chain of Being)’이라는 존재의 위계가 있다 – 하나님을 맨 꼭대기로 해서 그 아래, 천사, 그 아래 인간, 그 아래 동물 그리고 식물과 무생물이 존재하는 체제이다. 인간은 천사보다 못하고 동물보다 나은 존재이며, 인간들 중에서도 신의 대리인인 왕이 인간 집단을 대표하는 체제이기도 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백성인 인간 집단의 일원으로 자기 인식을 지닌 존재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징되는 이성, 로고스의 질서로 재편된 기독교 사회에서 이 집단에서 벗어나 홀로 있고자 하는 자는, ‘비정상’이라 규정되어서 정신 병원에 보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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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인간의 존재 의식에 혁명을 지피다

그러나, 인류는 시간과 함께 변화한다. 집단의 일원으로서의 존재가 홀로 선 개인이 되어가는 인식의 변화를 겪는다. 개인으로 홀로 서는 투쟁들이 시작이 된다. 신의 대리인이었던 왕을 끌어내려 단두대에서 참수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1789년에 일어난 이 프랑스 혁명은 거대한 정치 사회 혁명인 동시에, 인간의 자기 인식이 엄청난 혼돈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장이었다. 이 현장을 현지에서 똑똑히 보고 영국으로 돌아온 젊은 작가는 그래서 동료와 함께 그 인식을 담아 새로운 글쓰기를 해낸다. 바로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가 사무엘 코울리지 (Samuel Coleridge)와 함께 쓴 <서정담론 (Lyrical Ballads)>(1798)이다. 이 작품으로 영국의 낭만주의가 시작이 된다.

낭만주의는 그래서 사랑 타령에서 비롯된 사조가 아니다. 인간의 존재 인식에 혁명을 선포하며 나온 뜨거운 움직임에서 시작된 것이다. 비로소 인간은 개인으로 홀로 자연 속에서 느끼는 개인의 감정을 읊을 수 있게 된다. <서정담론>에 실린 시 중 하나인 <외로운 추수꾼 (Solitary Reaper)>에서 이러한 인식의 풍경이 여실히 드러난다..

인간이 드디어 홀로 서서 외로울 수 있기까지, 이 solitude를 누릴 수 있기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미약한 불길로 생존을 유지했던 동굴 속 원시인들에게 ‘개인’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사치였을 것이다. 그렇게 수만 년을 보내다가 가부장 왕국에서 백성이라는 집단의 일원이었던 존재 인식을 거쳐 드디어 홀로 서서 내 감정을 내가 응시하고 표현할 수 있기까지 수만 년, 수천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을 보면, 인간 존재 인식이 자라나온 큰 방향이 보인다.

조선이라는 왕국과 천황의 식민 지배를 거쳐 서구식 사회 질서에 난데없이 편입된 이 사회를 보면, 그 많은 혼돈과 불안은 구성원들이 이 ‘solitude’가 상징하는 개인으로서 존재 인식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서구 사회가 최소 수백 년에 걸쳐 일구어낸 존재 인식을 바탕으로 한 사회 제도 속에서, 여전히 그 인식은 혈연, 지연 등의 인맥으로 집단 속에 있는 사람들은 방황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왕좌왕하며 집단 감정에 묻혀서 우루루 몰려 다닌다. 감정 따위 집단에 맡기고 따라다니는 게 편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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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tude라는 단어를 다시 본다. 고독할 수 있기까지 서구 사회 사람들이 거친 지난한 세월과 역사를 본다. 개인으로 홀로 선다는 것, 고독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가 이제 남다르다. 묻는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자신만의 감정과 자신만의 생각이 있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으로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능히 지는 가. <혼자 있는 시간의 힘>과 같이 solitude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요즈음의 흐름을 보며, 이제 정말로 우리는 고독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 사회에서 말과 글에 책임지는 개인들은 어디에들 홀로 능히 서 있는가. 그 고독한 개인들을 부른다. 혁명으로서의 낭만은 그렇게 완성되리라는 소망으로 불러본다.

Joyce Park rowanee@naver.com 필자는 영어를 업으로 삼고 사람에게 가서 닿는 여러 언어 중 영어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한다. 현재 인천대학교에서 교양 영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영어 교재 저자이자 영어교수법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