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찬의 서삼독(書三讀)]신영복 <처음처럼> - 돌이킬 수 없는 인생, 매순간 처음처럼...

[안중찬의 서삼독(書三讀)]신영복 <처음처럼> - 돌이킬 수 없는 인생, 매순간 처음처럼...

아버지를 찾아뵈었던 날에 좋아하시는 떡을 사들고 갈까 고민하다가 빵가게 앞에 우뚝 섰다. 동네 몇 바퀴 돌다가 떡집을 찾지 못하고 그 흔한 빵가게에 들어가 먹음직스럽게 생긴 케이크 하나를 들고 나왔다. 언제부턴가 우리들은 떡보다 케이크를 더 많이 먹고 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SNS와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쏟아지는 화려한 콘텐츠가 케이크라면 책은 떡이 아닐까 상상한다.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가치 있다거나 훌륭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필자도 가끔은 케이크를 맛있게 즐기며 좋지 않은 재료로 만들어진 떡이나 맛없는 떡에 손사래를 칠 때가 있듯이 세상 모든 책이 마음의 양식은 아닐 것이다. 그저 필자가 맛있게 먹었거나 맛있게 먹고 있는 떡을 사람들에게 권하는 마음으로 괜찮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는 속담을 생각하며 예쁜 책 한 권 추천한다. 짧은 시 한 수로 시작하겠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추운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 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

[안중찬의 서삼독(書三讀)]신영복 <처음처럼> - 돌이킬 수 없는 인생, 매순간 처음처럼...

책의 제목일 뿐만 아니라 첫 장의 제목이기도 한 ‘처음처럼’은 20년 20일의 억울한 감옥살이를 했던 저자가 독방에서 쓴 시이다. 가장 서민적인 소주 이름으로, 가수 안치환의 노래로, 대중적인 서예 작품으로도 널리 사랑을 받게 되던 것이 책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외로운 독방에서 추체험(追體驗)으로 명상하다가 공책에 무엇인가를 쓰던 어린 시절 기억의 반추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무엇을 쓰다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다시 잘 써보겠다며 찢어버리기를 반복하다보니 멀쩡했던 뒷장마저 함께 떨어져 나가 난감했던 순간과 함께 나온 시어이다. 마음에 들 때까지 뜯어내고 새롭게 쓰는 것이 아니고 뭔가 새로운 마음으로 그 다음 장부터 다시 처음처럼 시작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깨달음이었다. 자신이 억울한 감옥살이로 청춘을 보내고 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을 후회하기 보다는 하루 두 시간의 햇볕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순간 처음처럼 다시 시작하는 다짐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 처음 붓글씨를 배우고 감옥에서 만당 성주표, 정향 조병호, 노촌 이구영이라는 걸출한 스승들을 만나 끊임없이 갈고 닦은 필법은 자신만의 서예 기법으로 완성된다. 동양고전을 바탕으로 관계론의 사상 체계를 완성한 저자가 우리 예술의 결정체인 붓을 통해 가장 서민적이고 한국적인 붓글씨와 독창적인 시서화로 대중 앞에 다가선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매사 진보적인 노학자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젊은이들도 쉽지 않은 어도비 포토샵과 코렐 페인터를 독학으로 익혀 노트북을 들고 홀로 여행하면서 컴퓨터그래픽으로 생각을 표현하는 경지에 이른다. 개정신판 ‘처음처럼’에 수록된 215편의 시서화는 동양의 오래된 필법과 서양의 새로운 CG 기술을 조화롭게 빚어낸 보기 드문 예술과 철학의 결정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마지막 강의를 끝내고 병마와 싸우던 노학자는 하루하루 마비되어 가는 불편한 몸으로 9년 전 같은 제목으로 제자들이 엮어 출간했던 책을 다시 내기로 결심한다. 먼저 세상을 떠난 제자이자 처음 엮은이였던 고 이승혁 님을 추모하며 약 90 편의 새 그림을 추가하여 ‘신영복의 언약’이라는 부제로 새롭게 구성된 원고들을 꼼꼼하게 정리하여 출판사에 보낸다.

개정신판 ‘처음처럼’은 그렇게 탄생했으며 저자는 책이 세상에 나오기 불과 한 달 여 전에 세상을 떠났다. 한 사람의 인생이 그 자신이 창조한 다양한 글과 그림으로 고스란히 녹아난 이 책은 한 권의 아름다운 잠언집이자 유고작이다. 완독을 목표로 후다닥 읽어내기 보다는 손이 쉽게 가는 곳에 두고 가끔씩 펼쳐보면 매순간 새로운 다짐과 위로와 활력이 될 것이다. 처음 인터넷 서점에서 노랗고 밋밋한 사진으로 색다를 것 없어 보이는 표지를 보고 실망했는데, 주문하고 직접 받아보니 기대 이상의 질감과 색감으로 기분이 좋았다. 새롭게 시작하는 계절에 누군가에게 선물하기에 적절한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두에 보기 좋은 떡과 같은 책이라고 소개한 이유이다.

[안중찬의 서삼독(書三讀)]신영복 <처음처럼> - 돌이킬 수 없는 인생, 매순간 처음처럼...

책은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다. 마음 가는대로 어떤 면을 펼치든 한 면 한 면이 작은 미술 작품이다. 줄탁동시, 당무유용, 샘터찬물, 우공이산, 지남철,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 유각양춘, 화이부동, 춘풍추상, 무감어수, 야심성유휘, 창랑청탁, 영과후진, 함께 맞는 비, 백련강, 수도꼭지의 경제학, 손잡고 더불어, 여럿이 함께, 너른 마당, 관해난수, 천하무인, 엽락분본, 석과불식... 몇 자 안되지만 매 쪽마다 마음을 움직이는 깨달음과 사색들은 책 읽는 속도를 한없이 더디게 한다. 실제로 신영복 선생의 글과 서화를 가훈으로 삼는 이들이 많다. 처음처럼으로 시작해 석과불식으로 마무리되는 손에 잘 잡히는 이 책이 풍진 세상에 드문 선물이 될 것이다.

이미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감동적인 수필 ‘청구회 추억‘ 영인본이 부록으로 제공되는 것도 기쁜 일이다. 별도의 그림책으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개정판에도 수록된 글이며 영화로도 제작될 예정이지만 사형 선고를 받은 청년이 유서 쓰는 마음으로 감옥에서 지급된 휴지에 써내려 간 절절한 느낌이 그대로 깊은 감동으로 파문진다.

266쪽에 수록된 ‘서삼독(書三讀)’이란 서화는 책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신영복 선생의 가르침이다. ‘독서는 삼독이다. 텍스트를 읽고 필자를 읽고 최종적으로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한다.’ 앞으로 매주 연재하게 될 이 칼럼의 제목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책 읽기를 떡먹기에 비유한 마음이 무분별한 독서 예찬으로 곡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칼럼에서 추천하는 책들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어떤 책을 읽을 것인지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처음처럼’을 곁에 두고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을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더 밝은 내일을 기약하는 독자들이 늘었으면 좋겠다. 책은 멀리서 찾아온 벗이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장거리 출퇴근길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관련 11권의 전문 서적을 집필하고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이다. 하지만 다양한 분야 여러 직업을 경험하면서 삶에 대한 애정과 추억이 많아 세상이 여전히 따뜻하다고 믿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