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 50년]<4> 삼성반도체의 전신, 한국반도체의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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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한국반도체 부천 공장 전경
<1974년 한국반도체 부천 공장 전경>

한국반도체 설립자인 강기동 박사. 그는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뒤 1958년 여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62년 오하이오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해 강 박사는 IBM 연구소, 제너럴일렉트릭(GE) 연구소, 모토로라반도체 3곳에서 취업 합격 통지서를 받아든다. 그는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위치한 모토로라반도체를 첫 직장으로 선택했다. 당시 고 강대원 박사가 이를 만류한 것으로 전해진다. 강대원 박사는 미국 벨연구소에서 모스펫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으며, 국내에선 `반도체 영웅`으로 추앙된다.

“거긴 이름만 연구소지 사실상 생산기지다. 박사 학위 받고 갈 곳이 아니다. 당장 IBM연구소로 가는 것이 좋겠다.”

강기동 박사의 졸업 논문은 트랜지스터를 만드는 방법론이었다. 직접 트랜지스터를 만들 수 있는 모토로라가 끌렸다.

당시 미국에선 3개의 반도체 대기업이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하고 사업을 본격 확대하고 있었다. 애리조나에선 모토로라, 텍사스에는 텍사스인스트루먼츠(TI), 캘리포니아에선 페어차일드가 위세를 떨쳤다. TI는 집적회로(IC)를 처음 개발한 잭 킬비, 페어차일드는 쇼클리트랜지스터랩에서 자리를 옮긴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 등이 각각 기술을 이끌었다. 노이스와 무어는 인텔의 창업주이기도 하다.

강기동 박사는 당대 최고의 반도체 업계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차곡차곡 기술을 익혀 나갔다. 그는 1967년에는 모토로라 한국투자조사단 일원으로 귀국해 활동하기도 했다. 모토로라는 그해 한국에 공장을 짓는다.

강기동 박사는 한국에 첨단 반도체 설계와 전 공정 생산 기술을 들여오고 싶었다. 그러나 기술 유출을 우려한 모토로라와 미국 정부가 이를 허락하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빤했다. 당시 서울에서 무역중계상을 하고 있던 김규한 켐코(KEMCO) 사장은 강기동 박사에게 “어떻게든 해보자”고 제안했다.

용기를 낸 강기동 박사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ICII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지분 50%를 김 사장과 친분이 있던 조 서더스에 줬다. 표면으로는 핵심 기술이 미국 ICII에 있는 것으로 보여야 했다. ICII는 다시 켐코와 5대 5 지분 비율로 한국에 합작 형태인 `한국반도체`를 설립한다. 그때가 1974년 1월이다. 그해 10월 한국반도체는 공장을 준공했다. 조립에 그친 한국 반도체 산업이 그 어렵다던 웨이퍼 가공 분야로 외연을 넓힌 역사의 한 순간이었다.

강기동 박사는 한국반도체 생산 설비를 활용, 전자시계용 CMOS 칩을 만들었다. 미국에서도 개발에 성공한 지 6개월밖에 안 된 최신 기술이었다. 김광호 전 삼성전관 회장은 “당시로서는 굉장히 진보한 기술로, 한국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대규모집적회로(LSI) 생산국 반열에 오른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1973년 세계 경제를 암흑 속으로 몰고 가던 오일쇼크 한파는 매서웠다. 한국반도체는 1974년 12월 공장 설립 과정에서 부도 위기를 맞게 됐다.

이건희 삼성 회장(당시 동양방송 이사)은 사재를 털어 켐코가 보유하고 있는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한다. 삼성은 1977년 12월 30일 ICII가 보유하고 있던 한국반도체 잔여 지분 50%를 인수하고 이듬해 3월 2일 `삼성반도체`로 상호를 변경했다.

국내 최초로 반도체 전 공정 기술을 보유한 그 회사가 오늘날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의 뿌리가 된 것이다. 물론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기반 기술이 워낙 부족해 삼성전자가 필요로 하는 부품은 만들지 못했다. 결국 삼성전자는 삼성반도체를 흡수, 반도체사업부로 개편한다. 그때만 하더라도 삼성반도체는 그룹의 미운 오리로 낙인 찍혀 있었다. 심지어 삼성반도체로 발령이 나면 회사를 퇴직하겠다는 직원도 있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