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샤카의 스타일 뒷방맹이] ‘진짜’ 죽어도 포기 못할 ‘죽일 놈의 패션’

[ON+샤카의 스타일 뒷방맹이] ‘진짜’ 죽어도 포기 못할 ‘죽일 놈의 패션’

[엔터온뉴스 대중문화부] 원래 ‘옷’을 비롯한 몸에 치장하는 것들은 기능으로 시작했다. 때문에 입거나 갖춘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후 종교적, 계급적으로 표현이 다양해졌고, 현대에 와서는 옷을 포함한 외적으로 표현되는 여러 가지 아이템과 더불어 ‘패션’을 통칭되면서 이제는 그 자체를 즐기는 시대로 변화됐다.

누구나 클릭 몇 번이면 유명 스타들의 패션을 비롯해 수많은 패션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자유롭게 표현하는데 당당하다. 그러나 트렌드가 바뀌고 정보 습득의 방법만 바뀌었을 뿐, 패션에 대한 관심은 현대인들만의 것은 아니다.

특히 여자들에게 있어 패션의 대한 관심은 이미 과거 시대에서도 종종 드러난다. 이는 조선시대든 중세 서양이든 마찬가지다. 간혹 이들의 패션에 대한 열망은 진짜 ‘죽을 수’도 있는 상황까지 가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정도였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머리위로 크게 부풀린 가채를 쓰곤 했는데, 가채의 크기와 가채위로 꽂는 장신구들의 화려함의 정도로 여인네들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유럽 중세시대의 여자들 역시 코모드(Commode)또는 퐁탕주(Fontange)라고 불리는 헤어스타일이 있었는데, 머리를 높이 말아 올리는 스타일이 우리 가채와 분위기가 많이 닮아있다.

루이14세 때 퐁탕주 부인의 머리가 풀려 머리를 모아 올린 것 에 유래했다는 이, 스타일은 머리를 높이 올리는 것이 미적기준이 되었기에, 머리를 높이 올리는 것에 서로 경쟁이 붙어 목에 심각한 무리가 갔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머리에 밀가루를 뿌리고 갖가지 보석과 레이스를 장식해 박는 것이 유행이었고, 머리감는 날을 지정해 두고 씻을 만큼 잘 씻지 않았다는 것이 특징인데, 앞서 말한 머리에 밀가루를 얹는 것은 며칠씩 씻지 못해 생기는 기름진 머리를 완화시키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여자들은 내천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유일하게 유둣날에만 머리를 창포물로 감고 목욕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동쪽에서 흐르는 강이나 내천에서 씻어야만 악의 기운이 동시에 빠져 나간다고 믿었으며, 머리에 비녀 같은 장신구를 하는 것은 미적인 수단 외에, 장신구로 가려운 머리를 긁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하니 유럽의 여인네들과 같은 고충을 겪었음을 생각하니 재미있는 느낌마저 든다.

유럽의 역사적인 사실을 보면, 향수가 산업으로서 발전하기 시작한 시기는 17세기 프랑스의 루이 14세 시대부터인데, 당시에는 피혁제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무두질 기술(가죽을 부드럽게 다루는 일)이 보급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죽에서 나는 특유의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 향료와 향수가 필수품 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향수산업의 시작을 알리는 시초가 되었을 일이지만 목욕을 잘하지 않았던 여인네들에게 있어서 심각한 고민은 몸에서 풍기는 악취였을 테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향수의 사용은 계속해서 늘어갔을 것이다.

[ON+샤카의 스타일 뒷방맹이] ‘진짜’ 죽어도 포기 못할 ‘죽일 놈의 패션’

조선의 여인네들 역시 향료주머니 향낭(香囊)을 몸에 지녔다는 기록이 있는데 향료사용의 대중화는 신라시대의 귀부인들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18세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공작부인’ 의 키이라 나이틀리의 스타일을 비추어보면 그 시대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패션을 엿볼 수 있는데, 치마를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 (파딩게일 이라고도 함)한 크리놀린(Crinoline)을 통해 부풀려진 스커트라인은 조금은 거추장한 느낌을 주면서도 그 속에 스며든 우아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그건 마치 조선시대 한복 안에 속치마를 많이 겹쳐 입어 치마라인을 부풀려 입은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고 할 수 있겠다.

유럽의 여인들은 크리놀린을 최대 지름 180cm까지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허리에 심각한 무리를 겪으며 스타일을 뽐내었다고 한다. 조선의 여인들도 겹겹이 입은 속치마로 인해 통풍이 잘되지 않아 답답했을 테고, 자리에 앉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다른 문화로 살았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위해 기꺼이 인내했던 그녀들의 미적 욕망은 서로 이렇게나 많이 닮아있었다. 그리고 이런 미적 욕망은 현대에까지 그 DNA가 흐르고 있다. 가채나 퐁탕주 때문에 목에 무리가 가도 포기 못하는 패션이나 44사이즈 이하를 입기 위해 영양실조까지 선택하거나, 외모를 위해 건강을 해치더라도 굽 높은 신발을 선택하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시대를 뛰어넘은 동일한 ‘욕망’에 감탄할 뿐이다.

[ON+샤카의 스타일 뒷방맹이] ‘진짜’ 죽어도 포기 못할 ‘죽일 놈의 패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