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출연연 R&D 정책기획력의 중요성

[과학산책]출연연 R&D 정책기획력의 중요성

`이삭 줍는 여인들`은 장 프랑수아 밀레가 1857년에 완성한 유화다. 수확이 끝난 밀 들판에서 이삭을 줍는 세 명의 여인을 그린 것이다. `이삭 줍기`는 표현 그대로 수확이 끝나고 떨어져 있는 이삭을 줍는 것이다. 열심히 주우면 끼니를 때울 수 있고, 재수 좋으면 앞서 간 사람이 놓치고 간 덩어리를 주울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내가 이 명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하다. 연구개발(R&D)을 20여년 한 요즘 내 느낌이다.

우리나라는 1970~1980년대를 거치면서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뤘다. 국민소득 3만달러를 눈앞에 두고 있고, 과학기술계의 R&D 역량도 눈부시게 발전했다. 과학기술계가 국가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돼 왔음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패스트 팔로워로서의 역량과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 준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과학기술계 R&D 생산성에 말이 많이 나온다.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의 R&D 생산성은 4.7%로 미국 산업 연구 중심기관 10.0%, 독일 프라운호퍼 7.7%에 비하면 초라하다. 이런 결과는 단기 성과 창출에 쫓기는 출연연 연구자들의 이삭줍기식 연구가 주된 원인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R&D는 단기 성과 창출에 내몰리거나 정권에 따라 바뀌는 정책을 따라가서는 결코 좋은 결과를 담보할 수 없다. 국가 산업 현장에서 꼭 필요로 하는 현장형 기초 원천 기술, 긴 호흡으로 5~10년 앞을 내다보는 중장기 연구, 20~30년 한국 과학기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국가과학기술 비전 등이 더욱 절실해지는 시점이다.

정부 출연연은 지난 40여년 동안 국가 R&D의 핵심 역할을 수행해 왔다. 보통 비즈니스맨은 40대가 되면 관련 분야에 어느 정도 지식과 경험을 축척하기 때문에 관리직이라는 독창성 강한 일을 할 수 있는 연령층이 된다. 이 시기야말로 기획력이 가장 잘 발휘될 수 있다고 한다. 한 부분만을 보고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시각이 부족한 젊은 시절과 비교해 전체를 조망하고 그동안의 경험과 아직은 고착화되지 않은 생각의 유연함을 발휘, 예지를 발휘할 수 있는 시기가 40대다. 사회에서 40대가 중추 역할을 담당하는 것처럼 40여년을 맞은 출연연이 강한 R&D로 국가 경제 발전에서 허리 역할을 담당해야 할 때다.

출연연은 국가 과학기술 분야에서 많은 지식과 경험을 축척했다. 비즈니스에서처럼 국가 R&D 분야에 예지력과 실행력을 갖췄다. 이를 바탕으로 기획력을 발휘할 때가 됐다. 국가 발전의 밑거름이 될 수 있는 강한 R&D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이 바로 출연연의 R&D 정책기획력이라 말하고 싶다.

정책기획력은 집을 짓기 위해 바닥을 다지고 골조를 세우는 일이다. 엄청난 양의 인력과 물자를 투입한 R&D가 사상누각이 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이미 많은 출연연이 R&D 정책기획 기능 수행을 위한 조직을 두고 있는 이유다. 출연연의 R&D 체질 개선과 세계 경쟁력 확보는 패스트 팔로워에서 퍼스트 무버로 변모하기 위한 핵심 요소다.

불혹의 나이를 지나 100년을 바라보는 출연연이 국가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다시금 수행하기 위한 R&D 정책기획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스스로 반문하고, R&D 정책기획 기능의 역할 재정립을 위한 인고의 시간을 가질 때가 된 것 같다. 정권에 따라 출연연의 R&D 방향성이 좌지우지된다고 볼멘소리를 하기보다 각 출연연이 강한 정책기획력을 바탕으로 중앙정부의 R&D 방향을 선도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단기 성과에 집착하지 않고 국가 발전을 위해 긴 호흡의 중장기 연구 테마 발굴을 위한 R&D 정책기획력 강화가 무엇보다 중요해진 시점이다.

강한 R&D 정책기획력이 중장기 R&D 전략 마련과 미래 기획을 통해 출연연을 명화 `이삭 줍는 여인들`의 주인공에서 꺼내 주기를 바란다. 이제는 출연연이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미켈란젤로의 명화 `천지창조` 주인공이 됐으면 한다.

권수용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미래전략실장 kweonsy@kriss.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