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30년 만의 데자뷔

[데스크라인] 30년 만의 데자뷔

역사는 돌고 돈다. 하나의 사건만 놓고 보면 제각각 다르고 혼란스럽지만 큰 줄기로 보면 역사는 반복된다. 일정한 주기와 패턴이 있다.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는 이 같은 `역사의 동시성`을 나선형에 비유했다. 역사가 비슷한 지점을 돌며 전진한다는 통찰력이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30여년 전의 미국과 닮았다. 1980년대 미국 산업계는 암울했다. 자동차와 가전제품뿐만 아니라 메모리 반도체마저 일본에 패권을 내줬다. 싸구려로 폄하던 일본산 제품은 미국 시장 70%를 석권했다. `실리콘밸리`가 원조인 반도체마저 추월당하자 탄식이 절로 나왔다. 급기야 세계 최대 반도체 소비 기업 휴랫팩커드(HP)는 “일본산 메모리가 미국산보다 품질에서 우수하다”는 양심 선언성 보고서까지 발표했다. 저가의 일본산 메모리는 신뢰도가 낮다는 통념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값싸고 품질까지 좋다면 `메이드 인 재팬` 돌풍을 막아 낼 재간이 없어 보였다.

30여년 후 똑같은 역사가 반복됐다. 미국 대신 한국, 일본 대신 중국이 그 위치에 섰다. 우리는 중국이 두렵다. `중국산=싸구려`라는 등식이 깨지면서 불안의 둑이 터지고 있다. 백색가전과 PC 시장은 이미 휩쓸고 갔다. 스마트폰, TV 시장도 격랑 앞에 놓였다. 멀찌감치 앞서 있다고 자부하던 디스플레이와 반도체도 몇 년 앞을 장담하지 못한다.

30년 만의 데자뷔. 불안이 엄습한다. 그런데 돌고 도는 역사 속에 희망의 단서도 있다. 절망 끝에 서 있던 미국 반도체 산업은 드라마틱하게 부활했다. 1981년 일본에 세계 1위 자리를 내줬지만 12년 후 정상을 탈환했다. 과연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리가 유심히 살펴봐야 할 대목이다.

미국 정부와 산업계는 1987년 극일 프로젝트를 수행할 `반도체기술연구조합(세마테크)`을 발족했다. 칩의 창시자이자 인텔 창립자인 밥 노이스가 손수 회장을 맡았다. 정부뿐만 아니라 인텔, 텍사스인스트루먼트 등 대기업이 거금을 출연했다. 세마테크는 시간이 걸려도 반도체 산업 생태계 육성 전략에 집중했다. 우선 마이크론, 사이릭스, 자일링스, 자이록 등 유망 기술 기업들에 투자했다. 기술력이 있지만 NEC, 히타치, 도시바 등 거대 일본 기업에 상대가 안 되는 기업들이었다. 이들 기업은 세마테크의 지원 아래 벤처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세마테크는 반도체 제조가 매력 만점의 역동 산업이라며 홍보에도 열을 올렸다. 우수한 인재가 반도체 산업으로 눈을 돌렸다. 그 결과 인텔, 퀄컴, 엔비디아 같은 세계 정상 기업들이 숲을 이뤘다.

한국에서도 30년 전 미국을 벤치마킹한 희망 프로젝트가 가동됐다. 반도체산업협회는 이달 초 2000억원 규모의 `반도체 희망펀드`를 운영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 세마테크처럼 중소기업, 스타트업 지원에 초점을 맞췄다. 역사가 돌고 돈다면 한국도 부활할 수 있다. 전제 조건은 성공 공식을 따르는 것이다.

미국 극일 프로젝트는 12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단기 처방이 아니었다. 빨리 빨리에 익숙한 우리가 과연 이 공식을 따를 수 있을까. 또 미국 정부는 매년 1억달러에 이르는 예산을 세마테크에 지원했다. 반면에 우리 정부는 투자할 만큼 투자했다며 연구개발(R&D) 예산을 오히려 줄이고 있다. 30년 전 데자뷔에서 희망보다 절망이 더 커 보이는 이유다. 30년 후 한국 산업사가 나선형으로 전진할지 후진할지 결과는 현재 선택에 달렸다.
장지영 미래산업부 데스크 jyajang@etnews.com

[데스크라인] 30년 만의 데자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