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12>그녀가 옳다, 사랑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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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 시절에 친구 C의 집은 담이 높았다.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공원만한 정원이 펼쳐졌다. 하도 넓어서 웬만한 놀이가 모두 가능했다. 가사 도우미와 유모가 수시로 간식을 내왔다. 먼발치에서 운전기사 아저씨는 우리를, 아니 친구 C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의 눈으로 지켜봤다. 그녀가 가난한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녀 집에서 이런 철딱서니 없는 사랑을 두고 볼 리 없다. 그녀는 무서운 아버지를 피해 친구 집을 전전하며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였다. 순수한 사랑에 감동한 친구들이 돌아가며 도피를 도왔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흥신소 직원에게 잡혀 집으로 끌려갔다. 이런 빤한 삼류 소설 같은 얘기가 다 있느냐고 하겠지만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저장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현실이었다. 드라마가 현실을 못 따라간다고 했는가.

그녀가 아버지 손에 잡혀 들어간 이후 소식은 이렇다. 가난한 청년과 사랑에 빠진 당시 그녀는 재수생이었고, 대입은 코앞이었다. 그녀는 단 일주일 동안 체육 실기 연습을 위한 합숙 훈련에 들어갔고, 명문대 체육학과에 입학했다. 아버지가 병원을 지어 준 의사와 결혼했다. 그 남자랑 어떻게 됐냐고? 놀랍게도 아버지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남자와 헤어지기를 자청했다고 한다. 도피 행각 도중에 남자의 집에서 이틀 동안 숨어 지내던 그녀는 그때까지 자기가 살아 온 환경과 너무나 다른 남자 친구의 집에서 '참을 수 없는 현실의 가벼움'에 눈을 떴다고 한다. 훗날 그녀는 아버지가 옳았다고 고백했다.

미혼의 젊은이에게 결혼은 까다로운 일이다. 조건을 맞추기가 어렵다. 살 집만 있으면 된 시절에서 이제는 '몇 평짜리 집을 제공할 것인가'로 구체화됐다. 차도 필수품이다. 청첩장에 새겨진 예식장은 호텔로 일반화된 지 오래다. 부모 재력이 아니면 이렇게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싶다.

첫눈에 반해 결혼했다는 소린 들어본 지 오래다. 사랑의 신열(辛熱)로 일상이 망가진 청춘을 천연기념물이라 부른다. 사랑이 아무리 고귀해도 남는 게 없으면 현명한 결정이 아니란다. 사랑이 밥 먹여 주냐, 돈이 없으면 사랑도 안 생긴다, 없는 집에 시집가서 '개고생'할 거냐고 주변에서 더 난리다.

항공사 승무원인 M은 지방에서 농사짓는 부모님을 두고 있다. 혼자 객지에 나와 고생 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항공사 승무원으로 취직했다. 직업이 괜찮은 그녀 앞에 사랑하는 남자가 나타났다. 성실하고 패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둘은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 결혼을 결심하고 친구, 선후배한테 결혼하겠노라 선언했다. 난리가 났다. 모두가 반대했다. 홀어머니에다 가진 재산이 없는 남자라는 게 이유다. 그녀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 건 '네가 어디가 어때서 그런 남자한테 가느냐'는 꼬드김이다. 늘씬한 키에 얼굴도 예쁜 그녀가 턱없이 아깝다는 주변의 사공들이 그녀를 흔들어 댔다. 그녀는 시집가도 친정 식구를 부양해야 할 형편이다. 가난한 시댁도 공양해야 하는 건 불 보듯 빤하다.

봄소식이 왔다. 그녀가 청첩장을 들고 찾아왔다. 지난겨울 힘든 결정을 내렸을 그녀의 인생 파트너가 누구일지 궁금했다. 청첩장에 신랑 이름이 낯익다.

“서울에서 집을 구하기가 힘들었어요. 수도권과 멀리 떨어진 변두리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할 거예요. 우리는 BMW(Bus, Metro, Walk)가 있잖아요. 아이도 낳을 거예요. 우린 아기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남편과 내가 열심히 벌면 조그마한 아파트도 장만할 수 있을 거예요. 지금은 힘들어도 저 남자랑 헤어지지 못하겠더라고요. 그이의 가난은 조건이 아니에요. 상황이죠. 상황은 극복하면 되는 건데….”

결혼식장은 둘이 다니는 작은 교회란다. '꼭 와 주실 거죠?' 수줍게 청첩장을 내민 손을 힘줘 잡았다. 사랑하는 남자와 백년해로할 그녀의 인생을 축복한다. 그녀는 지금도, 훗날에도 옳다. 진실한 사랑은 언제나 옳다.

문화칼럼니스트 sarahs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