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기술유출과 신물질 도입 지연 우려… 제도 현실성도 떨어져

“맛집에서 레시피를 강제 공개하라는 발상이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첨단 산업계는 화학물질 영업비밀 사전심사제도 도입을 골자로 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그동안 쌓아 둔 핵심 기술이 강제로 노출될 수 있다며 우려했다. 신물질 개발과 공정 내 안정적 도입은 기술 완성의 성패를 좌우한다. 반도체는 신물질이 공정 미세화의 핵심으로 꼽힌다. 이러한 핵심 재료의 물질 성분과 함유량은 가장 높은 수위의 기밀로 유지되고 있다.

사전심사제도가 도입되면 영업 비밀 판단은 심의위원회가 맡는다. 이렇게 되면 정보 유출 위험도가 커지는 것이 사실이다. 강병원 등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발의한 법 개정안에 따르면 심의위 구성은 노사 동수로 이뤄진다. 심의 과정에서 핵심 물질 성분이 환경노동 단체로 흘러들어가 중국 등 제3자에게 유출될 우려가 있다. 근거 없는 우려가 아니다. 최근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강병원 의원은 법원이 영업 비밀로 판단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관련 보고서를 일부 언론에 통째로 넘겼다는 의혹을 받으면서 홍역을 치렀다.

원하는 물질을 제공받기 힘들 수도 있다. 미국, 유럽, 일본에 본사를 둔 해외 전자재료 업체는 이 제도가 시행될 경우 국내로 수출을 꺼릴 수 있다. 글로벌 전자재료 업체의 고위 관계자는 “물질 성분은 우리의 지식재산인데 그것을 왜 한국 정부에 공개해야 하느냐”면서 “입장 바꿔서 중국이 그러한 제도를 도입한다고 생각해 보라, 수긍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당장 소량만 수입해서 사용하는 첨가 물질은 해외 업체가 판매를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 경우 수출 1위 품목인 반도체를 포함해 기타 첨단 산업은 어려움을 겪는다. 첨단 재료를 주력 산업으로 삼고 있는 선진국이 이 같은 국내 법 제도를 근거로 무역 보복을 가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제도 운영에 관한 현실성도 떨어진다. 환경부 자료에 따르면 현재 국내 물질안전보건자료(MSDS)에 기재되는 물질 항목만 63만개다. 매년 새롭게 추가되는 MSDS는 6만개에 이른다. 기존의 63만개는 고사하고 15명 혹은 30명의 심의위원이 매년 6만개 화학물질 영업 비밀 심사를 소화하기는 불가능하다. 고용노동부의 계산에 따르면 매년 신규 영업 비밀 심사를 위해 소요되는 인력은 260여명에 이른다. 건당 10만~50만원(유럽 기준)의 심사 수수료를 적용할 경우 천문학 규모의 비용도 투입돼야 한다.

산업계 관계자는 “노동자의 알 권리를 보호하자는 총론에는 공감하지만 각론은 선진국에 비해 과도하면서도 현실적이지 않은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면서 “합리적 결과 도출, 기업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산업계도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