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강국, 인재양성에 달렸다]<1>이름 없는 한국 과학자

우리나라 국가 연구개발(R&D) 역사는 70년에 달한다. 한국을 변방에서 산업 강국으로 도약시킨 데에는 과학기술 힘이 컸다. 기여도와 달리 우리나라에는 유난히 '스타 과학자'가 없다. 연구계에서는 '이름 없는 한국 과학자들'이라는 자조도 나온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젊은 층의 이공계 기피 현상도 심화되고 있다. 전자신문은 21일 50회 과학의 날을 맞아 우리나라 과학기술인 위상을 제고하고 고급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도모하는 기획 시리즈를 시작한다. 4회에 걸쳐 과학강국 달성을 위한 바람직한 인재 양성 방향을 모색한다.

과학자들은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사기 저하가 지속되면 '과기입국'의 꿈도 멈출 수 있다고 우려한다. 과학기술인에 대한 예우, 대중 인식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과학기술유공자 및 예우 정책 수요조사를 위해 실시한 설문에는 이런 위기가 고스란히 담겼다.

우리나라 유공자급 과학자는 이른바 '예우 정책'을 아예 경험해보지 못한 사례가 많았다. 과학기술인을 위한 주거·사무시설을 활용해 봤다는 응답자는 7.4%에 불과했다. 체육·문화시설 활용 경험도 13.5%로 낮았다.

그나마 가장 많이 경험해본 예우 정책은 국가 공식 행사 초청 및 의전(37.8%)이었다. 과학기술 정책 수립 자문, 공훈록 발간·업적 홍보 지원 경험률은 각각 29.9%, 15.3%에 그쳤다. 이 때문에 당장 예우 정책이 '들러리 세우기' 식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과학자가 가장 많이 경험해본 예우 정책은 국가 행사 초청 및 의전이었다. 하지만 만족도는 최하위를 기록했다. 해당 정책 만족도가 23.5%에 불과했다. 주거·사무시설 이용 만족도는 52.1%, 체육·문화시설 만족도는 38.6%이던 것과 크게 대조된다.

가장 흔한 예우 정책조차 연구자 불만을 사고 있는 셈이다. 과학자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예우 정책 전반이 짜였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과학자들은 초청·의전 예우 불만족 이유에 대해 '형식적인 자리 채우기 같아서' '행사의 장식용일 뿐 진정으로 예우한다는 느낌이 없어서' '정치를 위한 행사 같아서'라고 응답했다.

과학기술정책 수립 자문도 내실을 강화할 필요가 제기됐다. 과학기술정책 수립 자문은 우리나라 과학자가 공식행사 초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경험한 예우 정책이다. 설문 수치로 드러난 만족도(35.9%)는 평이한 수준이었지만 내용에는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주요 불만 사항으로는 '거의 결정 난 사안의 시행계획만 수립하는 형태라서' '제안한 의견이 정책에 반영되지 않아서' '전문성이 부족한 위원들로 구성돼서'라는 의견이 제시됐다. 정책 수립에 과학기술자 자문을 받지만 요식 행위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이다.

설문에 참여한 한 과학자는 “들러리라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토론과 심의를 하지만 이미 정해진 듯한 결론을 바꿀 수 없었다. 들어간 시간이 아까웠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과학자는 “과학기술자들이 참여하는 행사가 마치 중·고등학생 인원 채우기와 유사한 느낌을 받았다”면서 “일방적으로 연설을 듣고 오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자들과 자유롭게 소통할 기회가 더 많았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경제적 지원 정책은 더 많은 항목에 대해 경험 유무를 물었으나 저조한 경험률을 보였다. 교육·강연 지원금 수령, 연금 수령 예정, 연구조사 지원금 수령을 제외하면 10개 전 항목 경험률이 20%에도 못 미쳤다. 형식적 예우에 앞서 기본적인 경제 지원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높다.

과학기술 연구는 축적된 경험과 연륜을 요구할 때가 많다. 하지만 유공자급 과학자마저 정년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설문에서 정년 연장을 보장받은 적이 있다는 응답자는 17.5%에 그쳤다. 정년 후 재고용을 보장받은 응답자는 5.1%밖에 되지 않았다.

창업·기술지도 및 상담 시 지원금 수령(8.3%), 신진연구자와 학술 교류 지원(10.4%)도 대표적인 사각지대로 지적됐다. 고경력 과학기술자들의 역량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표다. 연구 성과 산업화, 신진 연구자 양성을 위해서라도 이 분야 지원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

유공자급 과학기술자에 대한 경제 지원 정책은 수요와 거꾸로 가고 있는 현상도 보였다. 경험률이 낮은 대표적인 취약 정책의 만족도가 높게 조사됐다. 정년 연장 보장, 정년 후 재고용 보장에 대한 만족도는 각각 62.3%, 69.7%로 가장 높은 축에 속했다. 정년 압박에 의한 사기 위축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신진 연구자와 학술 교류 지원도 절반 이상(54.4%)의 만족도를 보였다. 그 밖에 만족도가 높은 경제 지원책으로는 과학기술홍보·국제협력활동 지원금(58.5%), 과학기술 연구·조사 지원금(43.1%), 개도국 기술지원 지원(48.4%)이 꼽혔다.

설문에 참여한 한 과학자는 “과학기술 분야는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하는데 국내는 유독 정년을 강조해 과학기술 축적에 큰 장애 요인”이라면서 “정년 연장, 계속 연구를 위한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응답자는 “일정 수준의 기금 조성이 되지 않아 과학기술 연금이 공무원, 군인, 사학 등 타 연금보다 열악한 제도가 되고 있다”면서 “일반 은행 적금에 비해 조금 나은 정도여서 연금이라는 말이 무색하다”고 꼬집었다.

송준영기자 songj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