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72> 자리 정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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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스킨이란 기업이 있다. 1997년에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설립됐다. 이름은 영국 작가인 브루스 채트윈의 소설 '송라인스'에서 따왔다. 2012년 영업이익률은 41.7%에 달했다. 프라다, 록시탕, 투미보다 높다. 기업 가치는 버버리나 리치몬드 같은 명품 브랜드를 넘어섰다. 놀랍게도 몰스킨의 주력 제품은 종이 노트다.

몰스킨 '에버노트 스마트 노트북' 이미지
몰스킨 '에버노트 스마트 노트북' 이미지

2013년 3월 미국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짧은 기고문이 하나 실린다. 기고문에는 “너무나도 간명하지만 함축된 그래프를 하나 소개합니다”란 짧은 설명과 함께 간단한 그래프가 하나 그려져 있었다. 그래프에는 수평의 X축과 수직의 Y축이 교차한다.

X축의 오른편은 문화 요소가 강한 제품을 말한다. 왼편으로 가면 상업성이 짙어진다. Y축의 아래쪽은 기능성이 강조된 제품이란 뜻이다. 위로 갈수록 정체성이 강해진다. 문구류는 대개 기능성이 강조된 상업 제품이다. 그래프 왼편 아래쪽에 배치되기 마련이다.

명품은 다르다. 상업성을 띠지만 나만의 정체성이 강조된다. 왼편 위쪽에 모여 있다. 책이란 문화와 지식을 전달하는 기능 제품이다. 오른쪽 아래편이다. 이렇게 도표는 세 영역으로 채워져 있다. 몰스킨은 오른편 위쪽 공간에 덩그러니 자리 잡는다. 어떻게 종이 노트가 정체성과 문화를 대변할 수 있을까. 대부분 제품과는 정반대 공간에서.

많은 기업이 정체성으로 고민한다. 어떻게 경쟁력을 확보할 지도 고민거리다. 대개 해답은 차별화다. 좀 더 저렴하고 더 나은 기능을 제공해야 한다. 이렇게 강박은 시작된다. 그러나 과연 이런 방법뿐일까? 대니얼 맥긴이 던져 놓은 그래프가 말하는 것은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할까요?'란 질문이다.

정작 몰스킨은 두꺼운 미색 종이가 끼워진 양피 커버의 종이 노트를 말한다. 원래 프랑스 파리에서 유행한 이것은 무엇인가를 적어서 부푼 종이가 벌어지지 않도록 여물어 주는 고무 밴드가 달린 수첩이다. 1997년 밀라노 문구 기업인 모도앤드모도는 양피 대신 인조 가죽을 쓰긴 했지만 몰스킨을 되살려 낸다. 기존 노트나 다이어리, 플래너와 경쟁하는 대신 전혀 다른 공간에 자리 잡는다. 서적 위쪽에, 그리고 명품과 나란한 곳에.

제록스도 마찬가지다. 프린터나 복사기로 경쟁하는 것은 단순하다. 더 선명하게, 더 빠르게, 더 값싸게 인쇄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키워드는 인치당 도트 수와 분당 페이지 수다. 그러나 제록스는 “우리는 낭비를 줄이기 원합니다”라고 말한다. 사무용품 기업에 뭔가를 줄인다는 것은 상식에 따르는 선택이 아니다. 그러나 최고경영자(CEO) 어설라 번스는 치열한 산업에서 새로운 위치를 먼저 차지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빅 피벗(Big Pivot)'의 저자 앤드루 윈스턴도 경쟁력 있는 자리 잡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시장 경쟁은 치열하다. 시장은 복사기나 프린터 판매에서 운영 서비스로 옮겨 가고 있다. 값싼 것도 좋지만 전체 비용을 줄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새 전략이 수익을 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기업이 먼저 시작한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질 것이 자명했다.

몰스킨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오스카 와일드, 파블로 피카소, 어니스트 헤밍웨이 같은 애용자들을 활용했다. 빈 노트를 아직 채워지지 않은 창작 공간이라고 말했다. 무언가 자신의 이야기로 채우기 원하는 고객을 세계에서 찾았다. 많은 명품 브랜드가 그렇듯이 '누구든 나와 생각을 공유하는 누군가'를 고객으로 삼는다. 와일드, 피카소, 헤밍웨이가 파리에서 이방인으로 살고 있던 것처럼.

방식은 달랐지만 몰스킨과 제록스의 선택은 같았다. 누군가 놓친 새 위치를 먼저 찾는 것이었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보자. 기업에 '어제 같은 오늘(business as usual)'이 있을까. 혹시 새 자리를 찾지 않는다면 지금 내 위치를 누군가에게 물려주는 것 외에 대안은 없지 않을까.

“현상 유지란 지금과 같은 위치를 유지할 수 있다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성과는 대개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그것은 더 빨라지기 마련이죠.” 어쩌면 이제 그래프를 펼쳐 놓고 내 자리를 한번 따져볼 때인지도 모른다.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