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25> 질투는 너의 힘②-시시한 감정

[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lt;25&gt; 질투는 너의 힘②-시시한 감정

프랑스 철학자이자 문화사상가인 롤랑바르트는 질투를 이렇게 풀었다. “질투심을 느낄 때, 나는 네 번 괴로워한다. 우선 질투하는 것 자체에 대해, 나 자신을 책망하는 것에 대해, 내 질투심이 상대에게 상처를 줄까봐 두려워서, 내가 그런 시시한 감정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 괴롭다.”

철학자의 이성과 지성으로도 '시시한 감정'은 쉽게 통제되지 못하는가 보다.

사실 질투는 시시한 감정이 아니다. 가슴 가장 밑바닥에 감추어진 엄청난 파괴력의 인간본능이다.

내 나이 만 두 살에 남동생이 태어났다. 아들을 바라던 장손 집에 두 딸을 낳은 후 아들이 태어났다. 어머니 젖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진 세 살 꼬마 누이는 식음을 전폐했다. 말 그대로 세상을 등지고 벽만 바라보다 꼬마 누이 입술이 부르텄다. 큰 일 나겠다 싶어 어머니는 동생에게서 얼른 젖을 뗐다. 그렇게 '시시한 감정'은 세 살 여아의 삶을 지배했다.

비교 대상이 없으면 질투도 없다. 형제자매와, 학급 친구와, 입사 동기와, 남의 배우자와 비교한다. 상대보다 가진 게 적거나 없어서 미워하고 시기한다면 결국 자신의 열등한 감정과 싸우는 것과 다름없다.

미국의 저술가 해롤드 코핀(Harold Coffin)의 표현이 절묘하다. “시샘은 내가 가진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세는 기술이다.”

어려서 느끼는 질투는 시시해서 '샘'이었다. 짝꿍이 가진 고급 문구가 샘이 났고, 새로 전학 온 예쁜 여학생이 남학생 사랑을 독차지 하는 게 샘났다. 잘 사는 것, 예쁜 것, 공부 잘하는 것 등 가지고 있는 성분이 나보다 좋은 게 샘났다. 가진 것 없는 신세를 원망했을 뿐이다. 샘이 진화해서 질투가 됐다. 잘 살고 예쁘고 공부 잘하는 것을 파괴해야 직성이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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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조선수 손연재의 3월 초 은퇴기사에 수많은 악성댓글이 붙었다. 의아했다. 손연재가 무슨 잘못을 그렇게 했다고 밑도 끝도 없는 미움을 사야 했는지. 올림픽에 4등을 한 게 죄였다. 금은동 안에는 들었어야지 4위 가지고 뭘 잘했다고 영웅대접이냐는 못마땅한 반응이었다. 리듬 체조 분야에서 최초로 4위 한 것은 그리 치하할 일이 아닌 게 되었다. 갖가지 루머로 체조 요정의 눈부신 성적을 과대 포장으로 치부했다.

더 끔찍한 내용도 있었다. 아이돌 가수 출신 배우 '수지'에게 한 안티 팬은 “재수 없으니 교통사고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수지는 안티 팬 글에 “제가 죽었으면 좋겠군요” 라고 응수했다. 인기인이 치러야 하는 대가가 죽음이라면, 무심코 내뱉는 말에도 책임 물어야 한다.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대상조차 죽었으면 좋겠다니. 수지 당사자보다 도를 넘은 악성댓글에 부모 심정이 어땠을까.

질투는 원래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아는 만큼 비교되기 때문이다. 수지와 가까운 사이여서 질투 난 게 아니라면 수지가 죽기를 바랄만큼 미운 마음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비교(比較)는 마음을 병들게 한다. 견줄 비(比)에는 화살촉을 의미하는 비수 비(匕)가 두 개나 들어있다. 화살 하나가 상대를 향한다면 또 하나의 화살은 내게로 향하는 법이다.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이 클수록 내 마음도 허망하고 상처로 얼룩진다. 그래서 롤랑 바르트는 '시시한 감정'에 굴복하는 게 괴롭다 했다.

문화칼럼니스트 sarahs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