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31>외갓집과 여름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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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년시절 좋은 기억은 대부분 외갓집에서 뛰놀던 것들이다. 그곳에서 사회를 배웠고 질서를 습득했다.

초등학교 여름방학이면 어머니는 언니와 나, 남동생을 전남 장성 외할머니 댁으로 보냈다. 아래 두 여동생은 서울 집에서 부모님과 여름을 보냈다. 자식만 다섯, 아버지와 어머니 포함하면 우리 집은 일곱 명이 사는 대가족이었다. 귤 한 박스가 하루를 못 넘기고 거덜이 나는 대가족.

여름방학 외갓집은 더했다. 할머님 댁엔 외숙부과 외숙모, 다섯 자녀가 살았다. 여덟 명의 대가족이 사는 집이었다. 여기에 우리 세 식구가 가세했으니 외갓집은 전쟁터였다. 여름방학에 외갓집으로 보내진 건 우리 세 남매만이 아니었다. 큰 이모네 삼형제도 매년 외갓집 행이었다.

아이들만 열한 명, 어른이 셋. '축구선수팀에 감독과 코치, 팀닥터'를 구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여름철 외갓집은 선수촌이었다. 부엌에는 커다란 화덕 두 개에 시커먼 가마솥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밥 솥, 하나는 국 숱이었다. 가마솥에 가득 밥을 지으면 열한 식구 한 끼가 해결됐다.

서울에서 손주가 온다는 소식에 할머니는 기르던 소 한 마리를 잡았다. 방학 내내 먹어도 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곰국을 가마솥에서 끓였다. 한 끼에 열네 명의 식사를 해야 하니 만만찮았다.

외삼촌은 서울에서 온 외인부대에 규칙을 정했다. 외숙모를 돕기 위한 일일일조(一日一助)규칙이었다. 아침상 차림은 여자들이, 설거지를 돕는 건 남자들 몫이었다. 아이들의 대장은 당연히 이종사촌 큰오빠였다. 대장 완장을 찬 큰오빠는 외삼촌보다 엄격하게 역할을 배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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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사촌 오빠들은 수박서리 전문이었다. 이웃 마을까지 걸어가 수박과 참외를, 야채, 과일을 옷 속에 숨겨가지고 왔다. 밭주인한테 걸리지 않았지만 외숙부가 아는 날에는 종일 벌을 섰다. 뙤약볕 아래서 해질녘까지 손을 들고 서있어야 겨우 저녁밥을 먹을 수 있었다.

학교 교사였던 외숙은 거기서도 선생님으로서 실력을 발휘했다. 곤충과 식물 채집 요령을 알려주었다. 숙제 검사도 외숙 몫이었다. 서울로 올라갈 때면 곤충과 식물 말려 붙인 도화지 두께가 제법 두꺼웠다.

작년에 외국에 사는 조카가 방학을 맞아 한국을 방문했다. 목적은 미국대입시험(SAT)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해외 동포나 거주자 사이에서 한국 입시학원은 족집게 학습법으로 정평이 나 있다. 방학이 되면 학원가는 한국 학생과 외국에서 귀국한 학생으로 미어터진다. 친인척 집에 머물며 학원수업을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는 숙소도 마련해야 한다. 비용이 어마어마하다. 조카도 아침 일찍 집을 나가 밤늦게 들어왔다. 새벽까지 숙제를 했다.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은 한국 교육시스템을 칭찬했다. 압축된 교육시스템을 통해 강대국을 뒤쫓아가야 하는 대한민국 현실이 만든 결과다.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에서 눈부시게 활약하는 한국 여성 골퍼들 훈련 방식도 외국인 입에 오르내렸다.
4차 산업혁명기에 접어들면서 이제는 창의력이 화두다. 창의력은 '생각하는 힘'이다. 학생의 잡(Job)은 공부다. 요즘 아이들은 방학에도 일을 하는 셈이다. 오바마의 칭찬은 반갑지만 방학에는 쉬면서 다람쥐도 쫓고 물장구도 치고 수박 서리도 해야 한다. 생각하는 힘을 기르려면 뇌도 휴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미국 학생들의 방학은 쉬면서 독서하고 모험을 즐기는 재충전의 시간이다. 그걸 떠나서, 여름방학의 추억은 너무 소중한 유년의 필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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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니스트 sarahs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