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84> 새 라이프사이클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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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가을, 폭스TV는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심슨'이라는 새 시리즈를 내보낼 예정이었다. 일반 시트콤과는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애니메이션이었다. 1960년대 '플린스톤'이라는 만화가 저녁 방송을 탄 적이 있기는 했지만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폭스는 신생 채널이고, 시청자는 적었다. 뭔가 새 정체성을 보여 줘야 했다.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흘렀을 즈음 심슨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 방영되고 있는 애니메이션이자 시트콤이 됐다. 13년이라는 오래된 '오지와 해리엇의 모험' 기록도 갈아치웠다. 스물여덟 시즌 동안 32개의 에미상을 받았고, 줄곧 최고 시청률을 보였다.

[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84> 새 라이프사이클 만들기

오랜 기간 어떻게 최고 시트콤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여기서 배울 것은 없을까.

문영미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터널 비전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상식은 도입-성장-성숙-쇠퇴라는 라이프 사이클에 맞춰 제품과 기능을 개발하라고 한다. 사이클이 성숙해 갈수록 이런저런 기능을 덧붙여야 한다.

치약을 보자. 예전 같으면 상쾌한 기분이나 충지 예방 정도면 족했다. 지금은 플라그 제거, 미백, 잇몸 질환 예방 기능을 더해야 번듯해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 곡선을 따라가면 결국 쇠퇴기에 도달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소비자 마음에 오래된 제품이 아니라 새 제품으로 바꿔 자리 잡게 할 수 없을까.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자. 첫 번째는 리버스 포지셔닝이다. 더 많은 기능을 넣는 대신 오히려 줄여 보자. 그 대신 매력을 끄는 사양과 기능을 새로 넣자. 대부분의 가구 회사들이 온갖 취향의 고객을 고민할 때 이케아는 몇 안 되는 것만 덩그러니 보여 준다.

배달과 조립은 소비자 몫이다. 내구성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매장은 넉넉하고 정돈돼 있다. 아이를 맡아 주고, 군것질거리를 준비한 카페가 있다. 제트블루는 공짜 기내식과 왕복 할인을 없앴다. 그 대신 가죽시트와 넉넉히 다리 펼 공간을 제공했다.

두 번째는 포지션이란 것에서 멀찍이 도망가는 것이다. 포지션 깨뜨리기다. 인기 시트콤인 '프렌즈'를 보자. 10년이 흐르면서 주인공들은 20대에 시작해 어느덧 40대가 됐다. 반면에 바트 심슨은 여전히 10살짜리 모습으로 남아 있다. 스와치도 이 카테고리에 든다. 1983년 첫 출시 즈음 스위스 시계란 더 이상 변화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패션 액세서리가 되면서 시계란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과는 무관해졌다.

세 번째는 스텔스 방식이다. 아무도 모르게 한발 슬쩍 끼어드는 방법이다. 소니는 가정용 로봇 시장을 선점하고 싶었다. 첫 시제품이 급했다. 문제는 당장엔 가장 단순한 부엌일도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그 대신 2004년에 아이보를 출시한다. 2년 남짓 되는 기간에 10만대를 팔아치운다. 가정용 로봇으로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그러나 이것이라면 실수는 별반 문제될 것이 없었다. 로봇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애완용 강아지 아니던가.

[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84> 새 라이프사이클 만들기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 저자인 짐 콜린스는 한 가지 얘기를 들려준다. “어릴 적에 암벽 등반을 배운 적이 있죠. 벼랑에 매달려 있는데 로프가 갑자기 풀리더군요. 본능으로 바위 끝을 잡았고, 그러면서 로프 브레이크를 놓았어요.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탓에 정작 정말 떨어질 뻔한 순간이었어요.”

경영도 이 같지 않을까. 경쟁이 심해지고, 더 이상 차별화하기에 지쳐갈 즈음 생존 본능에 사로잡힌다. 이미 성숙기를 지났다는 두려움은 서둘러 뭔가를 움켜지게 만든다. 새 기능과 가치 제안이란 명분으로 온갖 것을 덧붙인다. 그리고 함정에 빠져든다.

1965년 제록스가 2400 복사기를 내놓자 선두이던 어드레서그래프는 위협을 느낀다. 무려 23개 신제품을 내놓는다. 그 가운데 16개가 실패한다. 공급은 대부분 미수금으로 남는다. 어드레서그래프에는 오프셋 기술이 있었다. 그러나 50년 동안 쌓아온 누적 수익을 단 1년 만에 날린다.

기본으로 돌아가 살펴보자. 고객이 제품에서 찾는 것은 무엇일가를 생각해 보자. 아이러니하게도 고품질 인쇄는 아직 오프셋 인쇄의 몫으로 남아 있다.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