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40>연애커뮤니케이션 (3)그녀를 만나기 100m 전

[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40>연애커뮤니케이션 (3)그녀를 만나기 100m 전

김 대리는 깊은 탄식과 함께 술잔을 비웠다. 헤어진 지 5년. 그는 그녀와 헤어진 이유를 아직 모른다. 첫사랑이었다. 가슴은 뜨거웠고 행동은 거칠 게 없었다. 3년 동안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이었다. 사랑했기에 생채기가 깊었다. 그녀와 다니던 캠퍼스는 물론 거리, 밥집, 카페, 영화관, 대학로 연극무대, 모두가 추억이었다.

그녀를 잊으려 군대로 갔다. 대학도 졸업했다. 어엿한 직장인이 됐다. 하지만 그는 아직 모른다. 그녀가 자신을 왜 그토록 어이없이 떠나갔는지.

[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40>연애커뮤니케이션 (3)그녀를 만나기 100m 전

그녀를 만난 지 2년 반 쯤 됐을까. 토요일 오후, 데이트 내내 그녀가 침울했다. 식당에서, 영화관에서도. 영화를 보자고 약속을 하던 전날까지만 해도 깔깔 웃던 그녀였다.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있냐고?” “나한테 기분 나쁜 일 있어?” “뭐라고 말 좀 해봐.” 몇 번의 채근 끝에 그녀가 짧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걸 몰라서 물어?”

'그걸 몰라서 물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아파왔다. 또 시작이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봐' '여자마음을 이렇게 몰라'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라고 사과했지만 데이트는 엉망이 됐다. 그녀가 물었다. “무얼 잘못했는데?” “거봐 너는 잘못한 것도 모르잖아?” “너는 이래서 문제야”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랐다. 점점 기분이 나빠졌고 언성이 높아졌다.

“내가 도대체 무얼 잘못한 건데, 너는 왜 매번 이러는 건데.” 화를 냈다. 대화에 논리가 없었다. 모르니까 묻는 거다. “곰곰이 생각해봐. 뭘 잘못했는지.” 숙제까지 던져주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갔다. 알 때까지 만날 기분이 아니라고 했다. 뭘 잘못했는지 몰랐기에 끝내 멀어졌다.

사귄 지 1년째부터 이런 일이 잦았다. 그때마다 그녀에게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실수했다' '다시는 안 그럴게' 사과했다. 이유는 몰랐다. 달랠수록 욕을 먹었고 면박이었다. 그녀에게 돌아온 말은 언제나 '네가 이래서 문제'였다. '썸'을 타고 사랑을 확인하며 열정을 태우던 가장 황홀한 순간을 제외하면 늘 이런 식이었다.

[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40>연애커뮤니케이션 (3)그녀를 만나기 100m 전

내 문제를 내가 모르니 해결이 안 됐다. 첫사랑 그녀를 만나는 동안 깨달은 것은 '여자는 남성과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외계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녀 생각은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고, 그녀의 말은 모더니스트가 쓴 시 그 자체였다. 모호함과 이중성의 조화. 남자의 단순함이 이해할 수 없는.

첫사랑과 아픈 기억 속에서 헤매다 김 대리는 1년 전 지금의 애인을 만났다. 귀엽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이 여자와 만난 지 6개월쯤 되면서 '데자뷰' 현상이 나타났다. 기억의 저편에 스멀대며 떠오르는 악몽, 어디서 본 듯한 표정. 눈꼬리가 올라가며 '여자마음을 그렇게도 모르냐'며 화를 냈던.

“나 어때?” “예뻐.” “그게 다야?” “아주 예뻐.” “뭐 달라진 거 없어?” “뭐가?” “뭐 달라진 거 없냐고?” “오늘따라 유독 예뻐.”

그녀가 침묵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지만 달라진 게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오답을 말하면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할 것이다. 만날 때마다 다른 그녀, 그게 뭔지 포착되지 않는다. 아찔하다. 만나자마자 이런 질문을 받는 건 끔찍하다. 달래주려면 하루가 모자란다. 실랑이로 하루를 보낼 것이다. 그냥 말해주면 안 되나. 왜 테스트냐고!

그는 지금 데이트하러 간다. 오늘은 영화 보는 날. 그녀를 만나기 100m 전이다. 두렵고 심장은 터진다.

문화칼럼니스트 sarahs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