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92>어느 등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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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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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서북단 끝 갈리시아 피니스테레. 항해하고 있는 한 선단에 정체 불명의 무전이 들려온다. “이곳은 A-853. 지금 우리와 충돌 경로로 항해하고 있으니 항로를 북으로 15도 변경하라. 오버.” 바로 응답이 나간다. “당신이 항로를 바꾸기 바란다.” 그러나 반응이 없다. “반복한다. 항로를 15도 변경하라.” 이때 누군가 마이크를 가로챈 듯 말한다. “이 배는 해군 함정이다. 항로를 변경하라.” 그러나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온다. “불가하다. 즉시 변침하라.” 그러자 화난 목소리가 스피커에 쩌렁쩌렁 울린다. “나는 항공모함 함장이다. 이건 우리 해군에서 두 번째로 큰 함정이다. 또 전함 2척, 구축함 6척, 순양함 5척, 잠수함 4척의 호위를 받고 있다. 당장 항로를 바꾸지 않으면 안전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 다시 말한다. 우리 진로에서 비켜라.” 갑자기 스피커가 잠잠해진다. 한참 동안 잡음만 들린다. 함장과 수병들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퍼질 즈음 스피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후안 알칸드라다. 친구 한 명과 함께 있다. 개 한 마리, 먹을거리 조금에다 맥주 2병, 졸고 있는 카나리아새 한 마리의 호위를 받고 있다. 당신이 뭐라고 말하든 얼마 못갈 거라는 점만 말해 둔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갈리시아 해안 벼랑 위 A-853 등대에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항로를 바꿀 방법이 없으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오버.” 한동안 잡음만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다. 그리고 간단한 한마디. “알았다. 오버.”

샙아이오와 넥스트젠 벤처 파트너스의 맥스웰 웨슬은 오랜 동안 여러 기업을 경험했다.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공통점이 있었다. 많은 대기업이 정작 혁신에 젬병들이었다.

1927년 대니얼 거버는 미국 미시간주에서 프리몬트통조림을 운영하고 있었다. 어느날 퇴근하고 보니 아내 도러시가 녹초가 돼 있었다. 과일과 야채를 다듬고 이유식을 쑤느라 하루 종일 부엌에서 꼼짝 못한 탓이었다. 아픈 딸에게 신선한 이유식을 먹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은 참이었다. 도러시는 일 바쁜 엄마도 언제든 신선한 이유식을 먹이고 싶을 거라고 남편에게 말한다. 진실이야 어떻든 거버 이유식은 이렇게 세상에 나온다. 그러나 1970년대 시장은 정체되고 있었다. 뭔가 새 시장이 필요했다. 성인용 식품이라면 어떨까. 신선한 고품질 먹을거리를 만드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식품이란 태반이 채소, 과일, 고기로 만드는 것 아닌가. 거버 이유식이 필요한 시간에 쫓기는 엄마와 아빠가 있다면 이들이 먹을 무언가도 필요한 셈이다.

거버의 도전에 시장은 바쁜 샐러리맨을 위한 뭔가 새로운 식단을 기대했다. 그러나 정작 식품점에 진열된 것은 과일과 삶은 채소를 으깨어 걸쭉하게 만든 이른바 퓌레라는 것이었다. 유아용 이유식과 몇 칸 떨어진 진열장에 놓인 내용물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거버 싱글스는 세 달이 채 못 돼 차례로 반품된다.

거버는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 웨슬은 많은 기업의 실패가 근시안 탓이라고 말한다. 퓌레는 경쟁사와 비교해 가장 자신 있는 제품이었다. 노하우를 활용할 수 있고, 남아 도는 설비도 돌릴 수 있었다. 결국 원인은 거버가 거버다운 것을 택했다는 데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웨슬은 대부분 기업에서 아이디어나 비전, 진취성이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거버는 성장하기를 원했고, 식품 시장을 도전 대상으로 택했다. 단지 지극히 자신만의 틀에서 문제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너무 진지하고 완벽하다고 생각한 방식에 따라.

북위 42도 52분, 서경 9도 16분 너머 바다 한가운데에서 그날 함장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가늠했다. 누구든 항로를 막는 것은 다른 함정일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함대의 크기는 누가 비켜가야 할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됐다. 그러나 버티고 선 것이 암초라는 것에는 할 말을 잃었다. 한번 생각해 보자. 혁신이란 것을 나만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등대 불빛은 참조하라는 것이지 그곳을 향해 달려들라는 것이 아니다. '항공모함과 등대의 다툼'으로 알려진 이 에피소드나 웨슬이 말하는 것도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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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