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인공지능, 신약개발 구세주일까 거품일까

[이슈분석]인공지능, 신약개발 구세주일까 거품일까

0.001%. 신약 후보 물질이 실제 임상시험 단계까지 진입하는 확률이다. 임상시험에 진입하더라도 약효와 안전성이 검증되고 판매 허가까지 획득하려면 10년이라는 기간이 필요하다. 소요 비용도 평균 1조원 이상이다. 제약업계가 연구개발(R&D)비를 증대시키고 있긴 있지만 신약 후보 물질 발굴은 갈수록 어렵기만 하다. 기술상의 한계 때문이다.

인공지능(AI)이 기대주로 떠오르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축적한 생물학 데이터베이스(DB)가 딥러닝 등 AI 기술과 만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동안 인간이 발견하지 못한 신약 후보 물질부터 임상시험 대상자 선정, 약 효능 예측까지 해답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는 앞 다퉈 AI 기술 투자에 한창이다. 우리나라도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바이오·제약 산업 발전을 위해 AI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AI 만능주의'가 바이오·제약 시장까지 덮쳤다는 우려도 있다. 막연한 기술에 대한 환상이 시장에 거품을 조장한다는 이유다. 현실과 기술 직시와 함께 선도 가능한 영역의 투자가 요구된다.

◇1000분의 1 확률, 신약 개발 갈수록 어려워

대체로 신약 후보 물질 1000만개 가운데 실제 임상시험에 진입하는 것은 9개 정도다. 그 가운데 단 하나만이 최종 판매 허가를 받는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허가 획득 시기도 1990~1994년에 평균 4.6년에서 2005~2009년 7.1년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연구개발(R&D) 투자도 막대하다. 'AI를 이용한 신약 개발 동향 및 사례'에 따르면 미국 제약사는 15년 동안 신약 발굴을 위해 약 520조원을 쏟아 부었다. 항공 산업의 5배다. 소프트웨어(SW) 산업과 비교해도 2.5배다.

신약 개발은 물리, 화학과 달리 통일된 방법이 없다. 약효는 사람마다 다르다. R&D 과정이 조금만 어긋나도 결과가 다르거나 동일한 결론을 반복해서 확인할 수도 없다. 결국 신약 개발비 증가, 높은 실패율, 부작용 발생, 검증된 물질의 경쟁 심화, 신약 개발 선도 요구 증대 등 다양한 도전 과제를 안고 있다.

◇바이오 빅데이터와 AI 등장

신약 개발의 한계에 이른 바이오·제약 산업에서 AI의 등장은 기대주를 넘어 '구세주'로 평가받는다. 바이오 빅데이터가 구축된 영향이 크다. 고속원료처리(HTS) 기술 개발로 대상 질환의 활성 약물 후보 선별 과정이 쉬워졌다. 수십 년 동안 축적한 생물학 DB를 활용, 빅데이터 기반의 가상탐색 기술인 델데스크가상화솔루션(DDVS)이 구현됐다. 비용과 시간이 대폭 단축됐다. AI 알고리즘, 고성능 컴퓨팅 기술까지 접목될 경우 자동화 속도는 더 빨라진다. 평균 15년이 걸리던 신약 개발 기간은 최소 5년, 신약 후보 물질 발굴 기간은 4.5년에서 1년으로 각각 단축된다. 연구원 1인당 1년에 200~300편의 논문을 검색하던 것에서 AI가 100만편을 동시에 조사한다는 연구 결과도 나온다. 신약 개발의 새 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신약 개발에 AI를 접목하는 모델은 크게 후보 물질 발굴, 임상시험 설계·운영, 효과 예측 등으로 나뉜다.

헬스케어 분야 AI 바람을 몰고 온 IBM 왓슨은 진단 지원뿐만 아니라 신약 개발 전 단계를 지원한다. 신약 개발용 버전은 엔터티 및 화학 화합물 검색은 물론 단백질 전사 후 변형 요약, 상관성 분석, 가설 생성과 연관성 예측까지 돕는다. 방대한 학습 데이터로 특정 질병과 유전자 연관 약물 후보를 찾는다. 임상시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해당 물질에 최적화된 임상시험 대상자 선별도 돕는다.

2015년 미국 벤처 아톰와이즈는 AI 기반의 약물 가상 탐색 솔루션 '아톰넷'을 개발했다. 심층신경망을 신약 개발에 적용한 최초 사례다. 이미 승인 받은 의약품 가운데 기존의 항바이러스제가 없는 신약 후보 물질을 탐색한다.

클라우드 파마수티컬스는 암, 염증, 희소질환 등을 대상으로 신약 설계·개발을 담당한다. AI와 클라우드 컴퓨팅을 결합해 가상 분자 공간을 검색하고, 새로운 약물을 설계한다. 투사는 기존 약물과 질병 간 예상치 못한 연관성을 찾는다. 빅데이터, 클라우드, AI 기술을 접목해 신약 후보 물질 탐색 플랫폼 'DUMA'를 개발했다. 인실리코 메디슨은 오믹스나 임상 결과 데이터로 컴퓨터 시뮬레이션 약물 스크리닝 시스템을 구축했다.

바이오·제약 분야 AI 기업이 성장하면서 대형 제약사와 협업도 강화된다. 얀센은 베네볼렌트AI와 손잡고 임상단계 후보 물질 평가와 난치성 질환 표적 신약 개발에 착수했다. 화이자는 IBM 왓슨을 도입해 호흡기·중추신경계 질환 분석, 만성질환 약물 효과 등을 검증한다. 머크는 아톰와이즈와 협업해 AI 기술로 에볼라에 효과가 있는 신약 후보 물질 2개를 발견했다.

◇국내 바이오·제약 시장도 'AI 열풍'

국내 제약사와 AI 기업도 신약 개발에 관심이 높다. 글로벌 임상시험 정보, 국내 임상 데이터 등을 활용해 신약 후보 물질 발굴 및 부작용 예측 등에 AI 기술 접목을 시도한다.

스탠다임은 기존에 발굴된 약물 가운데 알려지지 않은 약효를 찾는다. 약물 상호 작용을 포함한 약물 구조 DB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있다. 후보 물질의 실험 검증, 필터링, 피드백까지 시뮬레이션한다. 크리스탈지노믹스, 아주대 약대, 한국과학기술원 등과 신약 개발에 협력한다.

신테카바이오는 유전체 빅데이터 기반의 AI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승인 받은 약물이나 신약 후보 물질 적응증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바이오마커 발굴, 신약 후보 물질 도출 모델을 개발했다. 자체 개발한 항암 효과 예측 모델로 CJ헬스케어와 면역항암제 개발을 시도할 계획이다.

파로스 IBT는 신약 개발용 AI 플랫폼 '케미버스'를 개발하고 있다. 약물 관련 DB와 1200만개 화합물 정보, 200만개 표적 단백질 약효 데이터, 2억편의 논문 정보를 집약해 빅데이터 학습·분석 기능을 제공한다.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고 가상으로 탐색해서 유효 물질 발굴, 물질 특성 예측을 지원한다.

◇'AI 신약 개발 시대', K-메디슨 도약 기회

우리나라에서 허가된 신약은 29개다. 블록버스터급 신약 개발은 단 한 건도 없다. 세계 시장과의 격차가 크다. 신약 후보 물질 발굴부터 임상시험 설계 등 신약 개발 과정에 새로운 패러다임인 AI는 기회다. 우리가 자랑하는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 글로벌 격차를 줄일 필요가 있다. 최근 4차산업혁명위원회도 보건의료 분야의 추진 과제로 'AI를 이용한 신약 개발'을 선정했다.

배영우 아이메디신 대표는 “글로벌 기업과 비교해 신약 개발이 뒤처진 우리나라는 AI를 이용할 경우 시간과 비용을 줄여서 글로벌 격차까지 해소한다”면서 “4차 산업혁명 환경에서 바이오·제약이 핵심으로 떠오른 가운데 글로벌 공공 빅데이터를 활용한 AI 역량 확보는 필수”라고 강조했다.

인프라 부족과 기술 만능주의는 해소해야 한다. AI의 근간은 '데이터'다. 우리 바이오·제약 산업의 신약 개발 역사는 짧다. 대부분 복제약이나 개량 신약 개발에 집중했다. 신약 개발을 위한 임상 데이터가 절대 부족하다. 대형 제약사조차 거의 데이터 관리 전담 조직이 없다.

박래웅 대한의료정보학회 이사장(아주대 의대 교수)은 “글로벌 제약사와 달리 국내 기업은 임상시험 과정에서 쏟아지는 데이터를 체계화해서 수집·관리하지 않는다”면서 “축적된 데이터가 AI 역량의 근간이지만 데이터의 절대 양이 부족하다보니 글로벌 수준에 오르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술의 객관 분석 없이 AI가 신약 개발의 만능열쇠로 기대하는 인식도 문제다.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는 AI 기업과 함께 손을 내미는 제약사가 늘고 있다. 기술 이용 분야 및 목적, 활용이 가능한 인프라 등의 고민이 필요하다. 제약사가 데이터의 중요성을 인지, 관리를 체계화해야 한다. 기술을 뒷받침하는 벤처, 제도를 지원하는 정부기관 간 생태계도 필요하다.

김진한 스탠다임 대표는 “현재 AI로 신약 개발에 성공한 사례는 없다”면서 “기술 완성도가 떨어지고 보유 데이터가 부족한 상황에서 AI가 신약 개발을 이끌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자신문 CIOBIZ] 정용철 의료/SW 전문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