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48·끝>이별 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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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세대는 가을이면 이 노래를 즐겨들었다. 이브 몽땅의 '고엽(Les Feuilles Mortes)'. 시인 자크 프레베르가 노랫말을 붙이고, 조제프 코스마가 곡을 붙인 샹송이다. 노신사 트렌치 코트와 파이프 담배 연기만큼 만추에 어울린다.

고엽의 한 구절이다. “Les feuilles mortes se ramassent 〃 la pelle, Les souvenirs et les regrets aussi. Et le vent du Nord les emporte dans la nuit froide de l'oubli…(낙엽이 무수히 나뒹굴고 있네요. 추억과 회환 역시 북풍은 망각의 차가운 밤 속으로 그것을 실어가네요)”

뜻도 모르며, 노랫말을 '이두'로 적어가며 외워 불렀다. 노랫말 뜻을 안 건 한참 뒤다. 북풍이 부는 계절에 이별은 혹독하다. 춥기 때문에 슬픔은 아프다. 추억은 기억할수록 심장을 도려낸다. 오죽 아팠으면 가수 김광석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고 노래했을까.

'고엽'이라는 말이 멋있어서 작가 지망생 시절 자주 썼다. 그 단어를 읽으면 '고'와 '엽'이라는 발음이 서글프게 느껴졌고, 세상과 단절되는 기분이었다. 떠난 사람의 뒷모습이 떠올랐고, 낙엽 타는 냄새가 났다. 낙엽은 이별하는 연인에게 더없는 소품이다.

낙엽은 고등식물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이별 행위다. 기온이 13도 미만으로 떨어지면 식물은 생장을 멈추고 겨울나기를 준비한다. 뿌리에서 양분을 빨아들이지 못한 나무는 엽록소를 잃는다.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이별을 준비한다. 그것을 이층(離層)이라고 한다. '떨켜'라고도 한다.

이층은 잎자루와 가지가 붙은 곳에 특수한 세포층이 생기는 독특한 현상이다. 떨어진 나뭇잎을 보면 뭉툭하게 생겼다. 가지 쪽도 그렇다. 이층이 일어나는 과정에 변한 세포층은 수분과 영양분 이탈을 막고 미생물 침투를 막는다. 나뭇잎과 이별을 하며 더 이상 상처가 덧나지 않게, 몸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이층을 만든다. 나무는 현명하게 다가올 이별을 지구 역사를 통해 몸으로 준비하고 있다. 나무의 이별 공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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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은 온실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온실 속에서 자란 나무에는 혹독한 겨울이 없고, 상처받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침투할 병충해나 차가운 기온이 없는데 굳이 세포층을 변화시킬 필요가 없다. 나무의 이층은 대자연에서 자유롭게 살며 시련을 겪은 고등식물만이 누리는 위대한 이별이다. 고통을 받으며 살아간 생명체의 위대한 DNA다.

나는 불행하게도 아직 이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내 정신은 더 이상 상처가 자라지 못하도록 이층을 만들어 보호하지 못한다. 젊은 날 친구와 이별을 하던 때, 아들이 멀리 해외로 떠나갈 때 나는 한동안 아팠고, 슬펐다. 올해 아버지와 이별이 그랬다.

하지만, 이제 이별하려 한다. 나뭇잎이 제철을 맞아 엽록소를 잃고, 성장을 멈추고, 길거리에 낙엽을 떨구는 것처럼 아프지 않게 이별하려 한다. 이별은 갑자기 닥치는 것이 아니라 한껏 달리고, 먹고, 뛰어온 고등생물만이 누리는 행위라는 것을 알기에. 부족하지만 이제 고등생물로서 살겠다는 다짐도 한다. 뜻하지 않게 1년 동안 복에 겨울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 고개를 숙인다.

칼럼을 마치며 반성한다. 한 해 동안 거친 단어로 독자를 욕보이지 않았나, 칼럼에서 사례로 든 많은 지인에게 상처주지 않았나,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적폐'로 재단하지 않았나. 뒤늦은 반성을 하며 독자께 이른 새해 인사를 올린다.

문화칼럼니스트 sarahs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