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장비 국산화율 조사 6년째 멈춘 이유는

반도체 장비·재료 국산화율 조사가 6년째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주요 구매 업체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정보 유출을 이유로 자료 제공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수입에 의존하는 반도체 장비·재료의 국산화를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현황 자료조차 확보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일각에서는 외산 베끼기로 전락한 국산화에 집착하기보다 선도형 장비·재료 개발로 이 분야에서도 앞서 나갈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17일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장비·재료 국산화율 조사는 2011년을 마지막으로 6년째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협회는 2000년대 초반부터 반도체 장비·재료 국산화율 확대를 위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구매 부서로부터 주요 데이터를 제공받았다. 산업통상자원부 등 정부 부처도 이 자료에 기초, 후방산업계에 필요한 연구개발(R&D) 과제를 내놓았다.

반도체 장비 국산화율 조사 6년째 멈춘 이유는

그러나 2012년부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양사 모두가 자료 제공을 거부하면서 지금까지도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자료 제공을 거부한 이유는 정보 유출 우려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구매 데이터는 일종의 기밀인 데다 주요 구매 업체가 두 곳밖에 없어서 그것이 공유되면 상호 비밀을 알려주는 것밖에 안 된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후방산업계에선 현황 파악이 안 되면 문제점 역시 보이지 않고, 결국 적절한 지원 정책이 나오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다. 근래 반도체 분야 R&D 정책 자금이 계속 줄어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국산화율이 공개되면서 부작용도 낳았다. 정보 유출뿐만 아니라 해외 유력 장비·재료 업체가 이를 기반으로 특허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해외 장비 업체 관계자는 “좋은 말로 국산화, 수입 대체 효과지 사실상 해외 업체의 주요 기술을 카피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특정 품목의 국산화가 많이 이뤄지면 본사 차원에서 특허 소송 등 실력 행사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세간에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국산화 정책 혜택을 받은 여러 국내 장비 기업이 해외 업체와 특허 침해 분쟁에 휘말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세계 반도체 장비 판매액(약 61조원)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32%(약 19조5000억원)로, 대만·중국을 누르고 1위를 달릴 것으로 예상된다. 가장 큰 시장인 만큼 분쟁 위험이 높다.

이 때문에 반도체 후방산업계 육성 정책이 단순히 국산화를 추구하는 추격자형에서 차세대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선도형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 반도체 산업계의 기초 체력이 과거와 비교해 월등히 높아졌기 때문에 선도형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논리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가 마지막으로 조사한 국산화율 자료에 따르면 반도체 장비 국산화율(매출액 기준)은 20%를 소폭 웃도는 수준이다. 후공정 장비가 40% 이상으로 높았지만 전 공정 장비 비율은 10% 이하로 낮다. 재료는 40%를 웃도는 수준으로 전해졌다. 웨이퍼(SK실트론), 노광용 감광액(동진쎄미켐, 동우화인켐) 등 많이 쓰이는 품목이 국내에서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고부가 가치 후방산업 육성 정책을 제대로 펼치려면 산업계의 정확한 동향과 실태 파악이 중요하기 때문에 꾸준히 소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