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돈 쓴 전기차 충전기사업, '상상 초월 부실시공'

9개 시설 무작위 조사...절반 가까이 기준미달 '불량'

서울 현대백화점 천호점에 구축된 전기차 충전시설(
서울 현대백화점 천호점에 구축된 전기차 충전시설(

정부 지정 전기자동차 충전 사업자가 국가 예산을 받아 전국 각 지역에 구축한 공용 전기차 충전소 상당수가 부실 시공된 것으로 본지 조사 결과 확인됐다. 단순 공사·설치 규정을 위반한 수준을 넘어 사용이 불가능한 곳에 설치된 경우도 다수로 드러났다. 전기차 보급 확산을 위한 정부 예산이 충전 사업자의 배불리기로 악용되고 있는 것이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환경부는 전수 조사를 통해 부실 시공 충전 사업자를 색출, 올해 사업에 불이익을 주기로 했다.

부산 지역 한 아파트 주차장에 KT가 구축한 전기차 충전기. 충전기와 추차면 간 거리가 5m가 넘어 이용이 어렵다.
부산 지역 한 아파트 주차장에 KT가 구축한 전기차 충전기. 충전기와 추차면 간 거리가 5m가 넘어 이용이 어렵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충전 설비 불량에 대한 전기차 사용자들의 불만이 크게 늘고 있다. 실제 전자신문이 환경부가 구축한 전기차 공용 충전소 9곳을 무작위 방문한 가운데에도 절반 가까이가 기준에 미흡하거나 불량이었다. 특히 이들 충전소는 국가 충전 사업자가 지난해 9월 이후 구축한 최신 설비다. 아예 충전기 사용이 불가능한 2곳을 포함해 5곳이 공사·설치 규정을 위반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행신동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은 자동차 주차면 2개 규모의 오토바이 전용 주차장에 7㎾h급 완속충전기 2대가 설치됐다. 충전을 위한 차량 주차가 불가능하다. 스토퍼(차량 밀림 방지 장치)가 없어 위험할 뿐만 아니라 별도의 충전 주차면 표시도 없었다. 전기 배관도 노출된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

경기도 일산 행신동 한 아파트 주차장에 KT가 설치한 전기차 공용 충전소. 오토바이 주차장에 충전기가 설치돼 차량 접근이 어렵다.
경기도 일산 행신동 한 아파트 주차장에 KT가 설치한 전기차 공용 충전소. 오토바이 주차장에 충전기가 설치돼 차량 접근이 어렵다.

일산 지역 공용 충전소는 자동차 주차면이 아닌 주차장 통로 한쪽에 스토퍼·볼라드나 충전·주차 표시면이 전혀 표기되지 않았다.

경기도 일산 동구청 인근 상업시설에 KT가 설치한 전기차 공용충전기. 볼라드, 스토퍼, 전용충전,주차면 표시가 없다.
경기도 일산 동구청 인근 상업시설에 KT가 설치한 전기차 공용충전기. 볼라드, 스토퍼, 전용충전,주차면 표시가 없다.

부산 지역의 한 아파트는 규정에 따라 충전 주차면 표시, 스토퍼, 볼라드 등 설비를 갖췄지만 주차면으로부터 충전기 설치 위치가 5m가 넘어 충전 자체가 불가능하다. 국내 충전케이블 길이는 4m 이내가 일반형이다.

경기도 동구청 인근 상업시설에 볼라드, 스토퍼, 전용충전, 주차면 표시가 없는 충전기. 일산 행신동 한 아파트 오토바이 주차장에 설치된 충전기. 부산 한 아파트에 주차면 간 거리가 5m가 넘어 충전이 불가능한 충전기.(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경기도 동구청 인근 상업시설에 볼라드, 스토퍼, 전용충전, 주차면 표시가 없는 충전기. 일산 행신동 한 아파트 오토바이 주차장에 설치된 충전기. 부산 한 아파트에 주차면 간 거리가 5m가 넘어 충전이 불가능한 충전기.(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서울 용산구 아이파크몰에는 10여대의 일반 차량이 충전기 앞을 점유한 채 방치돼 있었다. 강동구 천호동의 현대백화점 충전소는 온갖 짐들이 쌓여 있어 차량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2013년 정부의 전기차 민간 보급 사업이 시작된 이후 설치 규정을 어긴 사례는 있었다. 그러나 기존에는 기기 설치 후 개통까지 시간이 지연되거나 사용자 인증 호환성 오류, 볼라드·주차면 표시가 없어서 불편하다는 민원이 접수된 수준이었다. 최근 설치 건에서는 사용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의 불량 공사나 허술한 관리 운영 실태가 다수 발견된 것이다.

업계와 전기차사용자협회에 따르면 KT가 구축한 충전소에 유독 부실 시공이 많았다. 공사비를 줄이기 위해 충전기 위치를 실제 사용되지 않는 곳에 달거나 전기·시설을 부실 공사한 사례가 많았다.

김성태 한국전기차사용자협회 회장은 “불편한 수준의 충전 시설은 간혹 있었지만 진입 자체가 어렵거나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상식 밖의 공사가 크게 늘었다”면서 “정부 홈페이지의 안내에 따라 충전소를 찾아갔는데 이 같은 환경을 접한다면 누가 전기차를 구입할 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국가가 지정한 공식 충전 사업자는 에버온, 지엔텔, 포스코ICT, 한국전기차충전서비스, KT 등 5개사다. 이들은 정부 정책에 따라 충전기당 평균 300만원 수준의 정부 예산으로 기기 및 설치비를 충당하고 충전 부지는 자체 영업을 통해 아파트 등 민간 시설을 활용한다.

충전기 설치를 위해 정부 예산을 받고 실제 활용도 개선보다 건수 채우기에 급급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자체 부지·사업비 하나 없이 많으면 수십억원의 정부 예산을 악용, 부실 충전 인프라를 구축한 셈이다.

KT 고위 관계자는 “전기차 충전 사업 첫해이다 보니 일부 미흡한 점이 있었다”면서 “자체 조사로 전기차 이용자들의 불편함이 없도록 빠른 조치를 취하겠다”고 해명했다.

정부는 부실 업체 관리에 강력 대응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형섭 환경부 과장은 “현장 실사를 해서 실태 파악 후 부실 공사가 드러나면 해당 사업자에게는 올해 사업자 선정 시 불이익을 주는 등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박태준 자동차 전문기자 gaius@etnews.com, 함봉균 산업정책부(세종) 기자 hbkon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