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부처간 밥그릇 싸움...반도체 R&D 골든타임 놓칠 수도

[이슈분석]부처간 밥그릇 싸움...반도체 R&D 골든타임 놓칠 수도

“그럴 줄 알았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각각 신청한 차세대 반도체 연구개발(R&D) 신규 사업안이 예비타당성 조사 경제성 평가도 넘지 못한 채 기술성 평가에서 낙방했다. 각계에선 비판이 터져 나왔다.

이 사업은 지난해부터 범부처 사업으로 공동 기획됐다. 반도체 분야 R&D 예산이 줄어드는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올해 초 산업부와 과기정통부는 돌연 각기 예타를 신청키로 방향을 틀었다. 표면적 이유는 예산을 빠르게 타내기 위함이었다. 예타 제도가 최근 개선되면서 사업 규모가 1조원 이상이고, 기간이 6년 이상인 경우에는 예타 신청 이전에 국가R&D사업평가자문위원회 검토를 받아야 한다. 산업부와 과기정통부는 이 과정을 생략하기 위해 각각 예산 금액을 1조원 미만으로 잡고 따로 예타 조사를 신청했다고 했다.

그러나 실상은 부처간 이견을 좁히기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두 개 부처라곤 하지만 사실상 3개 부처라고 보는 것이 맞다. 과기정통부 내에서도 과학기술(1차관)과 정보통신(2차관) 분야가 나눠져 있기 때문이다.

산업부는 반도체 산업계가 중단기 내에 돈을 벌 수 있는 상용화 기술 개발을 주장했다. 과학기술은 10년 뒤를 바라본 원천기술과 인력 양성에 초점이 맞춰졌다. R&D를 기획한 인물도 상이하다. 산업부는 업계, 과기정통부는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 박사 위주로 각각 과제를 기획했다. 양측은 '반도체'라는 키워드는 같지만 부처 성격이 다르고 중복 과제도 없다고 했다. 결과는 1차격인 기술성 평가에서 '낙방'이었다.

1년간 범 부처 사업으로 공동 기획했던 큰 그림의 차세대 반도체 R&D 사업안이 부처별 개별 진행으로 방향이 바뀌면서 사실상 몇 개월 만에 개별 기획안이 급조된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에 일부 정부출연연구소가 정보통신 분야 과제를 대부분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기획 과정 과정마다 물의를 빚은 것으로 전해졌다.

다소 감정 섞인 줄서기 논란도 일었다. 산업부에서 과제를 기획한 인물은 사석에서 “집 나간 (과기정통부와 일하는) 교수들은 언제 돌아오나”라고 했다. 과기정통부 측에서 과제를 기획한 인물은 “산업부 과제 기획 과정이 이렇게 불투명할 수 있느냐”는 일갈하기도 했다. 부처 밥그릇 싸움에 이어 반도체 분야 전문가들도 세 갈래로 분열됐다는 얘기가 나왔다.

문제는 지금의 상황이라면 개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정부 한 관계자는 “부서간 협업도 쉽지 않은데 성격이 다른 부처간 협업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 대학의 교수는 “한 번 낙방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획을 해야 한다”면서 “따로든 함께든 상호 보완적이면서도 탄탄한 사업 기획안이 나오려면 양 부처가 긴밀하게 협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 예타에 낙방하면서 내년 반도체 분야 R&D 신규 예산은 제로가 될 공산이 커졌다. 산업부든 과기정통부든 다른 분야에서 쓰고 있던 예산을 반도체쪽으로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됐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중국은 천문학적인 예산을 반도체에 쏟아붓고 있는데, 우리는 부처간 경쟁으로 R&D 골든타임을 놓치게 생겼다”면서 “산업계 지원은 물론이고 반도체 쪽으로 연구비가 나오지 않으면서 뽑아쓸 인력도 크게 줄어드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