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재계 거센 반발에 한발짝 물러선 스튜어드십코드 초안...연금사회주의 우려 여전

[이슈분석]재계 거센 반발에 한발짝 물러선 스튜어드십코드 초안...연금사회주의 우려 여전

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을 공식화하면서 상장사 우려가 커지고 있다.

17일 공개되는 스튜어드십코드 세부지침 초안에는 당초 '연금사회주의' 논란을 불러온 경영참여와 관련된 조항은 대거 제외될 것으로 알려졌다.

도입 수위가 약해 실효성이 없다는 시민단체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본시장 전반에 불고 있는 책임투자 확대, 주주권 강화 등 거세지는 주주행동주의 움직임은 상장기업을 긴장하게 만들고 있다. 국내 290여개 상장기업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주식시장 '큰손' 국민연금의 향후 행보에 상장기업과 자산운용사 이목이 집중된다.

◇635조원 국민연금, 시가총액 상위 10개 기업 가운데 절반은 최대주주

15일 국민연금기금에 따르면 4월 말 현재 국민연금이 운용하는 금액은 634조6010억원에 이른다. 635조원에 이르는 국민 노후자산 가운데 135조원은 국내 주식시장, 294조원은 국내 채권시장에서 운용된다. 나머지 136조원은 해외주식과 채권, 68조원가량은 헤지펀드와 벤처투자 등 대체투자에 투입된다.

135조원에 이르는 국민연금 국내 주식시장 운용자산은 약 290여개 상장기업에 투자된다. 시가총액 상위 10개사 가운데 삼성전자 우선주, 셀트리온,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제외한 7개 기업 지분 5%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시가총액 1위 삼성전자를 비롯해 포스코, 네이버, KB금융, 신한지주 등은 국민연금이 최대주주다. SK하이닉스와 현대차, LG화학 등은 2대주주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

대규모 거래도 빈번하게 이뤄진다. 국민연금이 2분기 중 디와이파워, 아세아시멘트, 인크로스, 대한제강, 서울반도체 등 지분 5%를 신규 편입했다. 다원시스, 티씨케이, 원익QnC, DGB금융지주 등은 지분을 매각해 지분 5%로 내려갔다. 국민연금이 2분기 중 주식시장에서 거래한 지분 보유 5% 이상 종목은 121개에 이른다. 지분 10% 이상을 보유한 종목 가운데 변동이 생긴 기업만도 40개를 기록하고 있다.

재계가 국민연금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에 반발하는 것은 막대한 수급 변동으로 인해 개별 기업 주가뿐 아니라 경영권까지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튜어드십코드는 연기금 등 기관투자자가 연금 주인인 국민 이익을 위해 주주활동에 책임성을 부여하는 원칙이다.

실제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공식화 이전인 지난달부터 본격적인 주주권 행사를 예고했다. 갑질 논란에 휩싸인 대한항공에 주주 서한을 보내 검찰 조사 등과 관련한 경영진 및 사외이사 비공개 면담을 요청했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 지분 12.45%를 보유했다.

재계 관계자는 “당장 공개될 스튜어드십코드 세부지침 조항에 경영권 간섭을 우려할 수 있는 조항은 빠진다고 하지만 주주권 강화라는 전반적 기조는 변화가 없어 보인다”며 “현재 공석으로 있는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이 누가 되느냐, 그리고 나머지 세부지침을 언제 추가 도입하느냐 등 시기 문제”라고 말했다.

◇경영 참여 빠졌지만 입김 강화에 떠는 상장사

4월 고려대 산학협력단이 국민연금에 제출한 용역 보고서를 보면 국민연금 주주권 강화를 위한 움직임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보고서에 담긴 원칙 초안에는 주식투자뿐만 아니라 채권 투자까지 적용을 확대하는 방안이 담겨 있다.

보건복지부가 마련한 초안에는 당초 연구보고서가 제시한 주주제안, 의결권행사 위임장 대결, 경영참여형 펀드 위탁운용 등 경영참여 조항이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상장기업 관계자는 “경영참여 조항이 빠졌다고는 하지만 그간 거수기 역할을 하던 국민연금이 주주총회 안건에 찬반 의사를 표명하고 투자 기업에 대한 비공개 대화에 나서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압박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최근 대기업 지배구조 개편 과정 등에서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가 목소리를 높이는 분위기도 기업에게 부담으로 작용한다. 앞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재편에 반대하고 나선 것과 유사한 형태로 국민연금을 통한 지배구조 재편 압박이 이뤄질 수 있다는 우려다.

복지부는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여부를 사전에 공시하고 민간 위탁 운용사에 의결권을 넘기겠다는 입장이다. 민간이 의결권 행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지만 위탁받은 운용사가 출자자 입김과 무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금융투자업계는 최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선임을 둘러싸고 불거진 각종 의혹도 공공분야 투자 확대 등 국민연금을 이용해 기업 경영에 간섭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데서 시작됐다고 해석한다.

한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국민연금 돈을 굴리는 30여개 운용사가 국민연금 방향성을 거스르는 결정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며 “비어 있는 기금운용본부장을 어떤 인물로 채우느냐에 자본시장이 촉각을 기울이는 이유도 국민연금이 갖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근일기자 ryury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