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명의 사이버 펀치]<73>'이배존' 없는 4차 산업혁명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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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명의 사이버 펀치]<73>'이배존' 없는 4차 산업혁명의 최후

'실수해도 안심할 수 있지만 안심하고 실수해서는 안 되는 사회'를 역설하는 이의 목소리가 신선하다. 서로 다른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는 노력은 필요하지만 이를 악용하는 처사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갑질과 미투 논란이 거세고 적폐 청산의 목소리가 서슬 퍼런 지금 새기기에 적합한 말이다. 비난의 아픔과 상처로 고통 받고 있는 이웃의 출현과 개방된 소셜 네트워크 행패로 불안해 하는 현실은 '이배존 운동'(이해하고 배려하고 존중하는 문화 만들기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다.

[정태명의 사이버 펀치]<73>'이배존' 없는 4차 산업혁명의 최후

서로를 이해하자는 주장은 성인군자가 되려는 도덕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행동과 사고를 이해하는 것이 결국 자신에게 유익을 돌려주기 때문이다. 남북 정상이 손을 잡고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는 것은 수백만 동포를 학살한 그들을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의미다. 미래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이해의 관계' 필요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해는 이념 간 차이, 세대의 갈등과 같은 덩치 큰 '뭉치 이해'도 있지만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는 왜소한 '조각 이해'도 있다. 그러나 크기와 상관없이 이해하는 것은 늘 어렵다.

이해는 자신의 편협함을 극복하고 실수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편이다, 내가 버린 쓰레기가 어떤 미술가에게는 예술품 재료가 될 수 있고, 너무 깨끗한 공간에는 아무것도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회는 피곤하다. 끊임없는 청산으로 심신이 지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해는 건강한 사회의 동반자다. 이해는 포용이 우선이며, 나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야 가능하다. 이해가 풍부할수록 국민과 사회는 평안하다.

[정태명의 사이버 펀치]<73>'이배존' 없는 4차 산업혁명의 최후

먼저 가라고 틈을 열어 주는 운전자의 배려가 하루를 밝게 하고, 빨리 오라고 손짓하며 엘리베이터를 잡은 친절이 사회를 아름답게 한다. 작은 몸짓에서 시작하는 배려의 영향력은 생각 이상이다. 그만큼 깊은 감정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작은 배려는 무시하고 큰 것부터 챙기겠다는 소리침은 위선이다. 내 이웃과 동료를 위해 배려하지 않으면서 북한 주민을 위하고 개발도상국 아이를 챙기겠다는 배려는 포장이다. 주위를 배려하는 작은 정성이 행복 배달부임을 배워야 한다.

[정태명의 사이버 펀치]<73>'이배존' 없는 4차 산업혁명의 최후

비대면 사회에서 존중은 '신뢰의 문을 여는 열쇠'다.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고, 남을 낮춰 보는 이에게는 존중이 결여돼 있다. 재력이나 권력을 무기로 갑질 하는 이들의 왜곡된 비존중 의식은 아픔과 갈등을 증폭시킨다. 비정규직이 아파하는 것도 사실은 그들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이 된 대로 행동하는 인공지능 로봇 시대에 개발자의 인간 존중이 없으면 나타날 결과는 처참하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로봇의 인간 살육이 현실화될까 두렵다.

이배존의 끈을 어디까지 묶어야 하는지가 늘 고민이다. 이해와 배려가 지나쳐서 질서가 무너지고, 인격과 무관한 가짜 존중을 빌미로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는 없다. 상한 음식보다는 짜고 매운 음식을 택한 선인들의 지혜가 이배존 운동에도 적용되리라 믿는다,

한 번만 더 이해하고, 조금 더 배려하고, 한 사람 더 존중하는 작은 움직임이 4차 산업혁명의 그늘을 지우고 인간 냄새 풍기는 내일을 보장할 것이다. 욕설과 폭력으로 얼룩진 로봇이 활개 칠 지 인간과 함께 화목한 하루를 그리는 로봇의 모습을 볼 지는 '이배존 운동' 성패에 달려 있다.

정태명 성균관대 소프트웨어학과 교수 tmchung@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