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인허가 전문가 없는 K-의료기기

[이슈분석]인허가 전문가 없는 K-의료기기

우리나라 의료기기 수출이 3조5000억원을 돌파하며 성장세를 이어간다. 초음파영상진단장비 등 진단기기가 글로벌 시장에서 신뢰를 얻고 성형용 필러 등 'K-뷰티' 영역도 빠르게 성장한다. 인공관절 등 고부가가치 제품까지 성장 탄력을 받으면서 의료기기가 고부가가치 시장으로 자리 잡는다.

'K-의료기기' 기대감이 높지만 위기론도 대두된다. 업계가 글로벌 시장을 겨냥하지만 인허가 전문 역량을 확보하지 못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글로벌 규제 동향을 발 빠르게 파악하고 개발단계부터 대응할 인허가 전문가는 손에 꼽는다. 외부 인허가 컨설팅 기업에 모두 맡기다보니 기술 유출 우려까지 나온다. 'K-의료기기' 세계화를 위해서는 제품 경쟁력은 물론 인허가 전문인력 양성이 시급하다.

◇'열매' 따기도 전에 위기...상업화 방점 찍을 인재 부족

지난해 우리나라 의료기기 수출실적은 30억 달러(31억6000만 달러)를 돌파했다. 최근 5년 간 7.6% 성장세다. 일자리 창출 효과도 크다. 지난해 기준 의료기기 업체 운영인원은 5만7595명으로 전년 대비 10.2% 증가했다.

보건의료 산업 기대주로 부상하지만, 열매를 맺기도 전에 위기론이 제기된다. 제품 판매 최종 관문인 인허가를 전담할 전문가 'RA(Regulatory Affair) 인력' 부족 탓이다.

RA 인력은 △임상 △품질관리 △사후관리 △의료기기 규제 등을 전담한다. 제품 안전성, 유효성, 위해도 등이 판매국가 규제에 적합한지 확인해 최종 허가를 받는 역할이다. 개발단계부터 임상시험, 개발 완료까지 전주기 제품 지식은 물론 국내외 규제까지 파악하는 고급인력이다.

2017년 기준 국내 의료기기 기업 수는 3283개다. 이중 RA인력을 1명이라도 보유한 기업 수는 10%가 안된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제약의료기기 산업실무 교육과정 개발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의료기기 기업 113곳 종사자를 조사한 결과 규제 대응 인력은 전체 1%에 불과했다.

◇RA 정규 교육과정 단 한개...1급 자격자는 달랑 9명

기업 내 인허가 전문가가 없는 것은 전문 인력 배출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이들을 채용할 여력도 없기 때문이다. RA 인력 양성 정규 프로그램은 식품의약품안전처 산하 한국의료기기안전정보원 교육과정이 유일하다. 정보원은 올해 기준 △의료기기 입문 △의료기기 인허가 △의료기기 품질관리 △의료기기 임상 △의료기기 해외 인증 등 5과정 23과목을 교육한다.

협·단체에서 실시하는 비정기 교육과정을 제외하고 국내 유일하다보니 수강생이 전국에서 몰린다. 2014년 처음 마련돼 연간 700~800명이 수강한다. 교육과정을 수료했다고 해서 RA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교육과정은 온라인 60시간, 오프라인 40시간으로 구성된다. 국내외 규제현황을 학습하고 인허가 획득 역량을 확보하기에 턱 없이 부족하다. 수업 교재와 커리큘럼 등도 표준화하지 못했다. 안전원이 검증하는 RA 1급 자격자 역시 현재 9명에 불과하다.

이성희 한국의료기기안전정보원 본부장은 “올해는 작년보다 10% 가까이 늘린 890명의 RA 교육과정을 개설했지만, 여전히 수요를 못 따라 간다”면서 “이들을 교육할 전문 강사도 부족해 강사 풀을 확보하고, 커리큘럼과 교재 등 표준화도 추진 한다”고 말했다.

RA 전문가가 늘어난다 해도 대부분 의료기기 기업이 채용할 엄두를 못 낸다. 국내 의료기기 시장은 연매출 50억원 이하 기업이 90%가 넘을 정도로 영세하다. 수입업체를 제외하고 순수 국산업체는 대부분 연매출 10억원 이하다. 상대적으로 고급인력인 RA 전문가를 채용할 여력이 없다.

국산 의료기기 업계 관계자는 “억대 연봉이 필요한 RA 전문가를 채용하기 보다는 인허가 시점에 외부 컨설팅 기업에서 기술문서 작성 등 절차를 밟는다”면서 “연구개발 인력 채용도 버거운 상황에서 인허가 전문 인력은 꿈도 못 꾼다”고 전했다.

◇'인허가' 외주에 의존...글로벌 경쟁력 약화 우려

보건의료 영역은 규제산업이다. 판매국가 규제에 맞춰 제품을 개발·판매해야 한다. 제품이 개발된 뒤 규제에 위배되는지 판단하면 늦는다. 개발단계부터 규제를 염두에 둬야 한다. 개발과 인허가를 따로 생각할 경우 막대한 자금을 들여 개발한 의료기기를 판매조차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외부 업체에 인허가를 위탁할 경우 규제 개정과 제품 업그레이드 등 상황 발생 시 기업 스스로 대응할 방법이 없다. 컨설팅 업체에 의존도는 갈수록 심화된다. 국산 의료기기 기업 90%가 외부 컨설팅 기업에 인허가를 맡긴다.

최근 의료기기 소프트웨어(SW) 탑재 비중이 높아지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SW 개발은 물론 인허가를 위한 안전성 검증까지 컨설팅 업체에 맡긴다.

한태화 연세의료원 산학융합의료센터 교수는 “최근 의료기기에 들어간 SW도 의무적으로 안전성, 유효성을 검증하도록 하는 IEC 62304 등이 강제화 됐다”면서 “우리나라 의료기기 기업은 SW개발부터 인허가까지 외주를 주기 때문에 규제 개정이나 유지보수 등에 스스로 대응할 역량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2016년 기준 533명에 불과한 국내 규제 대응 인력은 2022년 3743명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한국의료기기안전정보원 RA 전문가 1, 2급 모두 합쳐도 694명에 불과하다.

이 본부장은 “2022년까지 3000명이 넘는 RA 전문인력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되지만, 현재 교육 체계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면서 “수도권에 집중된 교육과정을 전국으로 확산하고, 글로벌 교육과정을 벤치마킹해 고도화하기 위한 국가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자신문 CIOBIZ] 정용철 의료/바이오 전문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