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석의 新영업之道]<13>갑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을을 놀리지 말라

[이장석의 新영업之道]<13>갑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을을 놀리지 말라

무난하게 계약될 것으로 보고받은 영업기회가 마감일까지 줄다리기를 거듭했다. 담당 본부장이 고객사로 간 지 열 시간이 지난 때였다. 수차례 경과를 확인하면서 계약이 어렵겠다는 판단을 하고 밤 10시 사무실을 나설 즈음 담당 본부장 전화를 받았다.

“고객과 담판을 지으려고 사무실에서 기다렸지만 외부에서 들어오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가까스로 통화했다. 고객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는데 자신을 만나려면 술자리로 오라고 해서 그곳에서 고객을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까지 설득해보겠다.”

어이없었지만 마지막 담판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가겠다'며 그곳으로 갔을 땐 밤 11시였다. 마감 한 시간 전, 담당 본부장은 시끄러운 음악이 들리는 어두침침한 대기실에서 고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12시가 지나서야 나타난 고객은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고, 비즈니스 주제를 심도 있게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득 없이 돌아서며 어깨가 푹 처진 본부장은 '죄송합니다'를 반복했다. '잊자' 라고 본부장을 다독이고 돌아서며, 난 그 고객을 다시는 안 만나겠다고 결심했다. 지금도 그날 황당함과 자괴감을 잊지 못한다.

그는 비록 담당 중역이었지만 최종결정자 승인을 못 얻었기에 자신이 결정할 안건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을'에게 자신의 의사결정만 남은 것처럼 행세했고, 그것을 무기로 '을'을 가지고 놀았다.

이런 갑은 도처에 있다.

몇 년 전 콘도회원권 계약과정에서 성실하고 열정적인 영업직원을 만났다.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어 회원권 구매 의사가 있는 선배에게 소개했다. 선배는 좋다며 자신에게 전화를 하게 해달라고 해서 연결시켜 주었다. 며칠 후 선배와 통화했느냐고 물었다. '예. 그 회장님은 중고 회원권을 고려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던데요.' 그럴 리가 없다며 선배에게 물었다. '아니야. 살거야. 그런데 그냥 덥석 사면 안 되고 다른 옵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조건이 유리해지거든. 걱정하지마.'

영업직원에게 잘 될테니 정중하게 대응하라고 코칭했다. 하지만 그 후로 유사한 핑퐁은 반복됐다. 영업직원은 '부정적인 느낌'을 계속 얘기했고, 선배는 확인할 때 마다 '걱정하지말라'고 답했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선배에게 계약했는지 물었다.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이 대표, 그거 말이지, 회원이 많아서 회원권은 사는 순간 돈이 잠기고 가치는 떨어지는 거야.”

“그러면 처음부터 사겠다는 뜻이 전혀 없었네요. 그런데 왜 저에게 산다고 애기했나요. 의향이 없었다면 그렇다고 얘기했었어야지요. 공연히 열심히 사는 젊은 친구 쓸데없는 일 하게 하고 상실감만 주었잖습니까.”

그가 이제까지 '을'을 그런 식으로 다룬 '갑'이었다는 것을 몰랐던 나의 실수였다.

이런 갑은 지금도 차고 넘친다.

의사결정권이 없어도 '을' 앞에서 유난히 큰 척 하는 '갑'이 많다. 영업직원이 실상을 모르는 것이 문제지만 대부분 '을'은 어쩔 수 없이 당한다.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갑이 오늘도 을을 헤매게 한다.

들러리로 세우기 위해 을을 초대하고 불필요한 일을 시키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갑이 있다. 후에 사실이 드러나도 아무런 미안함도 못 느낀다. 자신의 손익은 정확하게 셈하는 갑이 자신 때문에 불필요한 일에 투입되는 을의 시간 낭비는 당연하게 여긴다.

그로부터 '을'이 받는 상처가 더 크다는 것도 모른 척 한다.

분명하게 얘기해야 한다. 불확실한 일정, 정해지지 않은 것, 회사의 규정, 기밀 사항 등 갑이라도 본인 의지와 관계없이 감춰야 할 일은 분명 있다. 상대방에 대한 신뢰 부족으로 정보 공유 수위를 조절할 때도 있다. 협상 과정에서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보를 변형시키는 일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있어야 한다. '난 의사결정자가 아니예요.' '이번 건은 1% 가능성도 없어요.' '이미 결정한 안건이지만, 참고할 정보를 제공한다면 고맙겠다.' '나는 전혀 관심 없으니, 불필요한 시간 쓰지 마세요.'

최소한 사실대로 얘기하고 을이 의사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갑의 최소한의 인격이다.

이장석 한국영업혁신그룹(KSIG) 대표 js.aquina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