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과학기술 연구와 히든 피겨스

원광연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이사장
원광연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이사장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고, 용기에는 한계가 없다.' 1960년대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흑인 여성 과학자 세 명의 실제 이야기를 다룬 영화 '히든 피겨스'의 포스터 문구다.

흑인과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하던 1960년대에 세 명의 주인공이 각자의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이며 편견을 깨고 NASA 문화를 조금씩 바꾸게 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실력이 뛰어났지만 숨겨져 있던 이들, 즉 히든 피겨스를 발굴하는 것은 조직에 큰 행운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조직에서 인종·성별·연령·문화 간 차이가 잘 융합될 수 있도록 하는 다양성 경영(Diversity Management)이 뒷받침돼야 한다.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로빈 일리 교수와 데이비드 토머스 교수는 다양성 경영을 세 단계로 나눈다. 차별-공정성 관점, 접근-정당성 관점, 통합-학습 관점이다. 첫 번째 차별-공정성 관점 단계에서는 채용, 승진 등에서 차별 요소를 제거해 모든 구성원에게 공평하고 공정한 기회를 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때 조직 내 소수 그룹의 인력이 증가하는 특징을 보인다.

두 번째 접근-정당성 관점에서는 조직 구성원에 있는 다양성 수준을 높임으로써 새로운 사업으로의 진출 가능성을 높인다. 이때는 소수 그룹에서 주요 지위나 직책으로 진출하는 비율이 증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세 번째 통합-학습 관점에서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더 많이 활용하게 되고, 업무 효율이 높아진다. 이 단계에서는 창의성이 발현될 수 있는 조직 문화가 형성되고, 서비스 혁신이 이뤄진다.

그들은 이 연구를 통해 다양성이 증가할수록 조직의 창의성이 증대된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이 밖에도 여러 연구에서 조직의 다양성이 확보되면 의사결정과 문제 해결 능력, 창의성, 혁신성, 유연성이 향상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그렇다면 우리 연구 기관들은 지금 어느 단계에 있을까. 차별-공정성 관점과 접근-정당성 관점 단계 사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공정성을 기하기 위한 제도 보완을 통해 채용, 승진에서 차별 요소는 사실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쉽게 보이지 않는 차별 요소는 남아 있다. 많은 외국인 연구자가 한국에서 연구를 하고 싶어 하지만 외국인도 내국인과 동등한 임용 기준이 적용되며,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외국인 채용을 가로막는 차별 요소가 되고 있다. 실제로 최근 5년간 외국인 연구자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2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여성 연구자의 경우에도 세계 과학기술 분야 여성 연구자 비중이 30% 수준인 데 반해 우리나라 여성 연구자 비중은 아직 20%에 못 미치고 있다.

통합-학습 관점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구성원이 다양성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는 다양성 풍토(Diversity Climate)를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단순히 특정 인력에 대한 숫자나 비율을 높이는 수준을 넘어 다양한 생각과 가치관이 어우러져 연구자가 자신의 능력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과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연구자의 성별·인종·국적이 아니라 연구자의 호기심, 열정, 실력이다.

경제학에서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결코 깨뜨릴 수 없는 장벽'을 유리천장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에서 바뀌지 않는 것은 없고 바뀌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없다. 이것이 과학의 특성이다. 깨뜨릴 수 없는 장벽이 있다면 그것을 깨뜨리는 것이 과학기술의 역할이다. 실력을 갖춘 과학기술인인 히든 피겨스를 발굴하고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좋은 연구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 의무이다.

원광연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이사장 wohn@nst.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