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 김정식 회장 별세]대덕전자 50년 성장 비결은 '오직 기술'

대덕전자 모태는 고(故) 김정식 회장이 1964년 세운 '삼성전기제작소'다. 당시 공학도 출신 청년이었던 김 회장은 공군에서 함께 복무한 통신장교 출신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관수용 통신기 개발에 도전했다. 을지로3가 작은 공장으로 출발했던 삼성전기제작소는 1968년 성수동에 넓은 규모 공장으로 이전했다.

이후 김 회장은 진공관을 대체하는 트랜지스터가 개발되면서 PCB(인쇄회로기판)를 처음 접했다. 부품 간 연결을 모두 전선으로 하던 시대였는데 PCB가 등장하면서 인쇄 회로 위에 부품을 납땜해 올리는 방식으로 바뀌자 전자제품의 무게와 부피가 획기적으로 줄게 됐다.

김 회장은 PCB를 직접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을 갖는다. 그러던 중 미국, 유럽, 싱가포르, 대만을 한 달 동안 돌아보는 정부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당시 김 회장은 해당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전자산업이 발전하는데 PCB가 핵심 부품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이후 대덕전자는 자체 기술로 PCB를 개발하기 위해 좌충우돌했다. 통신기용 단면 PCB를 양산했으나 수입에 의존하는 PCB를 대체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1973년경 일본 출자기업인 한국동양통신과 한국동경전자에 첫 국산 PCB를 공급하는데 성공하면서 조금씩 수입 PCB를 대체해 나가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는 금성사에도 PCB를 주문받았다.

대덕전자는 양면 PCB 기술 개발을 위해 일본 우라하마전자 제안을 받아들여 합작법인을 세웠다. 이후 1972년 한국 최초로 양면 PCB를 출시했다. 우라하마전자가 유럽에 수출하는 전탁기 등에 부품이 탑재되면서 1973년 매출 1억원, 1974년 매출 2억원에 이르는 등 빠르게 성장했다.

이후 5년 만에 합작법인 지분을 인수하면서 회사 이름을 '대덕전자'로 바꿨다. 가전용 PCB를 생산하는 대덕산업과 산업용 PCB를 생산하는 대덕전자로 양분했다.

대덕전자는 1984년 캐나다 노던텔레콤(노텔)과 PCB 공급 계약에 성공하면서 세계 PCB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당시 노텔은 AT&T, ITT 등과 함께 북미 최대 교환기 제조사 중 하나였다. 노텔은 자체 PCB 공장을 처분하고 외주제작사를 찾는 과정에서 대덕전자와 손을 잡게 됐다.

교환기 단가를 크게 낮추면서 제품 신뢰성은 갖춰 노텔이 북미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데 대덕전자가 기여하게 됐다. 또 PCB 전문업체 시대가 열리는 계기를 제공하게 됐다.

이후 PCB 시장은 신생 기업 탄생, 대기업 진출 등으로 수백개 기업이 난립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대덕전자도 이 과정에서 실적이 줄어드는 등 경영난을 겪기도 했지만 1990년대부터 다시 성장세를 써나갔다.

스마트폰, 반도체, 디스플레이 시장 성장에 맞춰 대덕전자도 꾸준히 첨단 기술을 선보였다. 2014년 대덕전자의 휴대폰 기판 사업을 모두 대덕GDS로 이관하고 대덕전자는 반도체용 패키지 회로기판 사업에 집중했다. 이런 변화로 실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각기 5G, 첨단 반도체 등 미래 시장에 대응할 기술력을 갖추는데 성공했다.

배옥진기자 witho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