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유리병에 갇힌 벼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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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라인]유리병에 갇힌 벼룩

곤충 학자이자 벼룩 여왕으로 알려진 루이저 로스차일드 박사의 벼룩 실험은 환경과 습관이 한계를 단정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사례로 회자된다.

로스차일드 박사는 30㎝를 뛰어오르는 벼룩을 높이 10㎝ 유리컵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벼룩은 높이 10㎝ 뚜껑에 계속 부딪쳤다. 그러나 뚜껑에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 않을 때 뚜껑을 열었더니 유리컵 밖으로 나오는 벼룩이 없었다.

본래 능력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높이임에도 유리병에 갇혀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로스차일드 박사는 무기력이 학습돼 스스로 능력을 제한했다고 추론했다.

자칫 유료방송 사업자가 합산규제라는 유리병에 갇히는 건 아닐까 우려된다.

유료방송 합산규제 재도입 여부가 약 한 달 연기됐다. 지난해 말부터 최종 결정을 차일피일 미룬 게 한두 번이 아니어서 지루함을 느낄 정도다.

국회는 최종 결정을 전제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5월 16일까지 유료방송 사전규제 폐지와 공익성 강화를 포함한 입법(안)을 마련하라고 요청했다.

이해관계자를 포함, 특정사업자의 시장점유율을 33%로 제한하는 유료방송 합산규제는 2015년 6월에 3년 일몰로 도입돼 지난해 6월 효력을 상실했다.

효력 상실 10개월이 경과한 유료방송 합산규제를 재도입하는 게 적절한 지에 대한 갑론을박은 차치하더라도 국회가 최종 결정을 회피한 건 분명하다.

이뿐만 아니라 국회는 과기정통부에 부담을 전가했다. 국회 본연의 역할인 입법을 정부에 떠넘겼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더라도 이해가 안 된다.

이보다 앞서 과기정통부는 합산규제 폐지를 비롯해 유료방송 사전 시장점유율 규제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한편 사후 규제가 적절하다고 제안했다. 과기정통부가 제안했을 때 제대로 논의하지 않은 당사자는 국회다.

국회가 최종 결정을 할 수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유료방송 합산규제 재도입 여부는 특정 사업자의 유리함과 불리함을 떠나 유료방송 시장의 방향성을 결정할 분수령이 될 공산이 크다.

유료방송 합산규제 재도입 여부로 국회가 허송세월하는 동안 유료방송 시장은 급변하고 있다. IPTV·케이블TV는 성장 한계에 직면, 돌파구를 찾기 위한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반면 넷플릭스, 유튜브 등 강력한 신종 경쟁자가 등장했다. 단순한 등장이 아니라 연일 맹위를 떨치고 있다. 온라인동영상(OTT) 서비스는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매김했다.

급변하는 유료방송 시장에 대응하기 위한 사업자의 고민도 깊어 가고 있다. 유료방송 사업자 간 합종연횡이 가속화되고 있다. IPTV 사업자의 케이블TV 사업자 인수합병(M&A), SK텔레콤과 지상파 방송 3사의 OTT 서비스 통합이 대표적이다. 모두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그러나 유료방송 합산규제가 재도입되면 당장 KT는 규모 확대가 불가능하고, 장기적으로 다른 유료방송 사업자에도 영향이 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경위야 어찌됐든 과기정통부가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됐다. 무엇보다 유료방송 사업자가 규제에 얽매여 스스로 능력을 제한하게 해선 안 된다. 벼룩 실험처럼 합산규제라는 환경으로 사업자 능력을 한정시키는 건 금해야 한다.

시장에 맡기고 사업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최선이다.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단죄하면 된다. 과기정통부의 합리적 판단을 기대한다.

김원배 통신방송부 데스크 adolf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