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경제전쟁] 日 수출규제조치 후 2주…일본 전략과 전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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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화성 파운드리 공장 전경(자료: 삼성전자)
<삼성전자 화성 파운드리 공장 전경(자료: 삼성전자)>

# 일본 정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3종에 대한 수출 규제 조치를 단행한 지 10여일이 지났다. 갑작스런 일본 조치에 국내 산업계와 정부는 마치 벌집을 쑤신 듯 했다. 일부 부정확한 정보가 혼선을 부추기기도 했다. 국내 반도체 업체들의 소재 재고가 2주밖에 남지 않았고, 조만간 가동을 중단할 수 있다는 우려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혼란스런 상황은 조금씩 정리가 되고 일본의 의도도 뚜렷해지는 분위기다. 이번 사태가 확대 또는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아진 가운데, 민관 모두 차분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일본은 급소(?)를 찌르지 않았다

일본이 수출을 까다롭게 한 소재는 △포토레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 △불화 폴리이미드다. 모두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에 사용되는 소재다보니 초기에는 일본이 한국의 핵심 산업에 타격을 입히려 한다는 해석이 나왔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일본이 '급소는 찌르지 않았다'는 풀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대표 예가 포토레지스트다. 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 대상에 올린 포토레지스트 중 초미의 관심을 끈 건 △15나노(㎚) 이상~193나노 미만 파장의 빛에서 사용하는 레지스트 △1나노미터 초과~15나노 미만 빛에서 사용하는 레지스트였다. 1~15나노 미만은 극자외선(EUV) 노광공정에서 사용되는 포토레지스트를 뜻한다.

하지만 '15~193나노 미만'을 놓고 해석이 엇갈렸다. 학계 일부에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현재 메모리 제조에 주력으로 사용하는 불화아르곤(ArF)용 포토레지스트를 포함했다는 분석을 내놓은 반면 업계에선 ArF 파장이 193나노이기 때문에 '193나노 미만'은 ArF용을 제외한 것이란 해석이 맞섰다.

지난 4일부터 수출 규제 조치가 단행된 후 ArF용 포토레지스트는 일본에서 정상 수입돼 일본의 규제 대상은 EUV용 포토레지스트에 한정된 것으로 확인됐다.

업계에선 일본이 EUV에 국한한 이유, 즉 ArF를 제외한 배경에 관심을 보였다. 한국 반도체에 타격을 주려면 현재 가장 많이 쓰는 ArF용 포토레지스트를 포함하면 되는데, 굳이 왜 뺏냐는 것이다.

[한일 경제전쟁] 日 수출규제조치 후 2주…일본 전략과 전망은?

◇일본은 왜 여지를 남겼을까

불화폴리이미드도 당초 걱정보다는 파장이 크지 않은 분위기다.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는 최근 주요 고객사들에 서한을 보내 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 대상으로 지정한 불화폴리이미드가 실제 제품 생산·공급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알렸다.

단, 고순도 불화수소는 다소 시급한 상황으로 보인다. 일본이 잘 만들기도 하지만 현재 공정이 일본산 소재에 최적화돼 있어 다른 불화수소로 바꾸기 힘들다. 우리 기업 입장에서는 일본 불화수소 재고 확보가 최우선인 상황이다. 그러나 불화수소 교체가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에 공장이 중단될 위기까지 상황이 전개되면 소재 교체라는 특단의 조치가 단행될 것이란 전망이다.

관심은 일본 정부가 왜 '숨통'을 열어뒀냐는 것이다. 이는 한국 반응에 따라 강도를 조절하겠다는 협상 전략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전 세계 정보통신기술(ICT) 시장에 파장을 일으키는 건 일본으로서도 부담이기 때문에 다른 국가에 미치는 영향은 적으면서 한국이 민감할 부분만 고른 것 같다”고 말했다.

EUV는 이제 막 양산을 앞두고 있는 기술인 반면 ArF는 전 세계 메모리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 반도체 회사들이 사용 중인 기술이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도 제재 카드를 쓰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란 분석이다.

실제 일본 정부는 ArF를 놓고 막판까지 고심한 흔적을 엿보이기도 했다. 본지가 7월 3일 일본 경제산업성 홈페이지에서 내려 받은 수출규제 품목 리스트에는 '15나노 이상~245나노 미만 포토레지스트'가 명시됐다. 애당초 ArF 포토레지스트가 포함됐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날인 7월 4일 버전에서는 '245나노 미만'이 '193나노 미만'으로 수정됐다.

이 외에 일본 정부가 3개 소재에 국한한 점, 수출 금지가 아닌 수출 허가 절차를 까다롭게 한 점 등이 일본이 전략적으로 한국만 압박하려는 의도란 해석을 뒷받침한다.

245나노 미만을 언급했던 일본 경제산업성 자료
<245나노 미만을 언급했던 일본 경제산업성 자료>

◇강도 높이는 일본, 전면전으로 번질까

하지만 마냥 '낙관론'에 기댈 수만은 없는 것은 일본 정부가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어서다. 지난 12일 한일 양자 협의에서 일본은 우리나라를 안보상 우호 국가인 '백색국가'에서 제외하겠다는 방침을 재확인했다.

일본은 이를 위해 수출무역관리령 시행령을 개정, 오는 24일까지 의견수렴을 거쳐 각의 결정 후 공포하고, 그로부터 21일이 경과한 날로부터 우리나라를 백색국가에서 제외한다고 설명했다. 우리 정부는 8월 22일께부터 제외 조치가 단행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경우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일본이 실제 행동에 나서면 반도체·디스플레이·공작기계 등에 쓰이는 주요 소재부품은 물론 첨단소재·항법 장치·센서 등 무려 1112개에 이르는 품목이 일본 수출규제 영향권에 든다. 국내 제조업 전반의 타격과 세계 주요 산업의 글로벌 밸류체인(공급망)에도 영향을 주는 사안이다.

일본의 이 같은 움직임에 우리 정부도 '장기전'을 대비하는 모습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30대 그룹 총수들과의 대화에서 일본의 수출 제한 조치가 장기화될 가능성을 처음 언급했다. 외교적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자고 강조했다.

일단 오는 18일이 일본 조치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는 시점으로 꼽힌다. 이날은 일본이 제안한 강제징용 관련 '제3국 중재위원회 구성'에 대한 우리 정부의 답변 기한이다. 정부가 뚜렷한 답변을 내놓지 않으면 일본은 이를 다시 명분 삼아 추가적인 제재 조치를 단행할 수 있다.

복수의 업계 관계자들은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3개 소재 수출규제는 '맛뵈기'에 불과하다며, 일본이 백색국가 제외까지 실제 추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윤건일 전자/부품 전문기자 ben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