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샌드박스, 힘의 논리로…'택시 배송' 안갯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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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샌드박스, 힘의 논리로…'택시 배송' 안갯속

해외 출장을 떠나려 인천공항을 찾은 직장인 김모씨(40세·남)는 거실에 여권을 두고 온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집에 있던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택시를 불러 여권을 가져다달라고 했다. 택시기사는 여권을 건네받고 보라매공원에서 공항으로 내달렸다. 가까스로 비행기를 타게 된 김씨는 택시가 없었다면 중요한 출장을 망쳤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김씨처럼 택시를 활용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딜리버리T가 지난해 6~12월 택시기사 13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78%가 배송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배송 품목은 주로 박스, 서류, 의류, 음식, 식자재다. 명절 때 선물 배송 의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택시는 유휴 시간을 활용해 추가 수입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택시기사 96%는 택시 기반 배송 플랫폼이 도입되면 적극 이용하겠다고 답했다.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2016년 기준 택시 수요가 공급보다 높은 시간은 오전 7시부터 10시, 오후 9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30분 사이다. 나머지 시간대에는 공차 비율이 50%를 넘어선다.

딜리버리T는 이 같은 시장 상황을 간파, 택시 기반 배송 플랫폼을 개발했다. 지난해 7월 사업모델(BM) 특허를 등록했다. 최근 전국모범운전자연합회와 손잡고 규제 샌드박스 임시허가를 신청했다. 임시허가는 서비스 출시를 보장한다. 최대 4년간 사업에 나설 수 있다. 시장 반응에 따라 정식허가 전환을 위한 법 정비 절차가 병행된다.

그러나 난관에 부딪혔다. 관계부처 관계자와 전문위원이 참석하는 사전 검토회의에 해당 안건이 올라갔지만 통과 전망은 어둡다. 화물연대와 퀵서비스협회가 반대 입장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딜리버리T는 임시허가 진행 절차를 중단했다. 특정 지역, 조건 내에서만 시범 사업을 펼칠 수 있는 실증특례로 돌려 재도전할 계획이다. 사업 범위를 좁혀서라도 첫 발을 떼보겠다는 의지다. 관건은 사업 영역이 겹친다고 반발하는 화물과 퀵 업계를 어떻게 설득하느냐다.

화물연대는 여객과 화물운송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딜리버리T는 도심 내 긴급 배송 시에만 택시를 부르기 때문에 사업 영역이 겹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남승미 딜리버리T 대표는 “접수 통과도 어렵다는 규제 샌드박스에 들어왔는데도 이해관계 조정은 스타트업 몫”이라며 “제한된 범위에서 사업을 추진, 이후 문제점을 개선하도록 한 규제 샌드박스 취지가 퇴색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갈등을 조절해야 할 정부는 한발 물러서 있다. 책임을 회피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구태언 법무법인 린 테크엔로 부문장(변호사)은 “당초 법 취지대로 사업 혁신성이 검증되면 정부가 책임지고 실증특례를 내주면 된다”며 “힘의 논리로 움직여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규제 샌드박스는 이해관계 조정 기구가 아니다”면서 “갈등이 발생하면 사회적 대타협 기구에 맡기면 된다”고 덧붙였다.

최종희기자 choij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