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팔만대장경과 반도체

[기고] 팔만대장경과 반도체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일본 사신이 조선에 필요 없는 팔만대장경을 가져가게 해 달라고 요구하자 신미 대사는 10년이 걸리고 100년이 걸려도 스스로 만들어야 진정한 팔만대장경이라고 일갈한다.

600여년이 지난 요즈음 일본에서 들여와야 하는 소재 때문에 온 국민이 반도체 공부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영화 속 에피소드가 재미있게만 느껴지지 않아서 씁쓸하다.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백가쟁명에 필적하는 대안과 논의가 넘쳐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통찰력 있는 대안도 보이고 열정 넘치는 주장도 보인다. 산·학·연·관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해법도 다르고 우선순위도 달라지겠지만 자주 듣는 주장 가운데 하나인 장비·소재 평가 팹 사례를 살펴보자.

국내 기업이 반도체 소재·장비를 개발해도 대기업이 요구하는 시험 결과가 없어서 납품을 할 수 없으니 정부가 적게는 수천억원, 많게는 수조원이라도 투자해서 대규모 장비·소재 평가 팹을 만들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왜 외국에는 있는 장비·소재 평가 팹이 반도체 강국이라는 우리나라에는 없고, 그나마 만든 나노 팹들도 노후화돼 쓸모가 없어지고 있다는 질타도 이어진다. 그런데 이 논의에는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다.

세계에서 실제로는 반도체 제품을 만들지 않으면서 최첨단 12인치급 대면적 웨이퍼 공정이 상시 가능한 수준의 연구용 시설을 유지하는 곳은 IMEC(벨기에), CNSE(미국) 2곳뿐이다. CNSE는 IBM과 글로벌파운드리사가 차세대 반도체 기술 개발을 포기하면서 참여 기업이 감소하는 바람에 심각한 운영난을 겪고 있다. IMEC도 최첨단 차세대 반도체 제조 기술을 연구하는 기업이 줄면서 바이오, 센서 등으로 연구 분야를 다각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IMEC에는 97개국 출신 4000여명의 직원 및 연구원이 있다. 예산은 6000억원이다. 우리나라는 6개 나노 팹 직원을 다 합쳐도 고작 280명(2018년 기준)이고, 예산은 1000억원 조금 넘는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나노 팹과 유사한 시설로 미국 내 16개 나노연구시설을 통합 운영하고 있는 NNIN은 지난 3년 동안 800억원을 들여 294대 장비를 새로 설치했다. 그 가운데 정부 지원은 14대, 12억원에 불과했다. 이 수치로부터 우리나라 나노 팹은 예산 대비 상주하는 연구원의 수가 너무 적고, 기업 활용도도 낮을 뿐만 아니라 정부투자 이외 민간 부문에서의 자발 투자도 극히 미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대규모 시설 투자의 필요성을 주장하려면 이 같은 시설을 사용하게 될 민간 부문에서 투자 자발 참여 방안, 투자 규모에 걸맞은 국내·국제 사용자 확보 방안, 무엇보다 이 시설을 사용해서 개발하고자 하는 기술의 전략 가치 평가와 그에 맞는 투자 전략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한 가지 사례부터 정부의 지원 방향 논의는 넘쳐나지만 정작 민간 부문에서 상호협력방안이나 투자 자발 참여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는 것이 우리가 진짜 풀어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반도체 산업은 연간 매출이 400조원에 이르는 거대산업이고, 연간 약 22조원이 연구개발(R&D)에 투자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반도체 산업 규모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전체 반도체 산업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이 정도 규모라면 산·학·연의 자체 개선 노력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어떤 종류의 정부 지원도 제대로 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정부의 R&D 투자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기존 나노 팹은 민간의 추가 투자가 없어서 노후화될 수밖에 없고, 대기업은 국내 연구진보다 해외 반도체 연구 컨소시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또 중소·중견기업은 대기업이 필요로 하는 핵심 기술을 제때 개발하지 못하고, 이에 따라 외국 기업과의 기술 경쟁에서 뒤처짐으로써 기술을 무기화하는 타국의 견제에 무기력하게 노출된 이유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개선 방안 모색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팔만대장경과 같이 후손들이 자랑스러워 할 반도체 기술을 갖추기 위해 고통스럽더라도 변화의 길을 갈 것인지, 일본과 같이 반도체 패망의 길을 갈 것인지는 다행스럽게도 아직 우리 선택에 달려 있다.

이병훈 GIST 신소재공학부 교수 bhl@g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