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경제전쟁 100일] 한국 반도체,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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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서초사옥에 전시된 웨이퍼. <전자신문DB>
<삼성전자 서초사옥에 전시된 웨이퍼. <전자신문DB>>

# 지난 7월 1일, 일본 정부는 우리나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을 정조준했다. 우리나라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일본에서 수출되는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를 무기 삼아 한국 주력 산업과 정부를 압박했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직접적인 타깃이 된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체들은 지난 100일간 고군분투하며 생산차질 없이 위기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본 수출규제 조치는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체질을 개선하고 초격차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가동 중단' 위기…어떻게 극복했나

지난 7월 4일 일본 정부는 불화수소,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 불화폴리이미드의 대 한국 수출을 개별허가제로 전환했다. 기존에는 포괄 수출 허가 대상이었는데, 개발허가제로 바뀌면서 건건이 정부 허가를 받아야 했다.

국내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계는 비상이 걸렸다. 제조에 필요한 소재들이 일본 정부의 통제를 받으면서 소재 수입 중단과 공장이 멈출 상황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국내 반도체 공정이 '올스톱'할 것이라며 우려했다. 불화수소와 EUV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공정 필수 소재지만 일본 업체들이 독점적 공급 지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핵심 재료로 쓰이는 불화폴리이미드 역시 스미토모화학이 공급하고 있었다. 불화폴리이미드는 상대적으로 사용량이 적지만 삼성전자 폴더블 스마트폰 생산에 차질을 줄 수 있다는 시각도 있었다.

24시간 가동돼야 할 반도체 공장이 국가 간 갈등 문제로 멈추는 것을 막기 위해 삼성과 SK하이닉스 임직원들은 지난 100일 간 안간힘을 썼다.

양사는 대체재를 찾는 동안 재고를 아껴 쓰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최소한의 양을 제조에 투입하거나, 사용했던 제품을 재활용하는 등 공정을 조율하면서 대체재 찾을 시간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사이 양사는 대만, 유럽 등 세계 각지에 구매팀을 파견해 우회 경로와 공급선을 찾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직접 일본을 찾아 대책을 강구했다. 이석희 SK하이닉스 대표도 현지 회사들을 직접 찾아서 대안 마련에 절치부심했다. 또 일본의 수출 규제를 예상하고 작년 말서부터 마련한 대책을 본격 가동했다.

그 결과 대안을 속속 마련했다. 가장 의존도가 높은 EUV 포토레지스트는 일본 JSR과 벨기에 IMEC가 만든 합작법인 RMQC를 통해 부족분을 채웠다.

삼성과 SK하이닉스 모두 불화수소 대안도 찾았다. 삼성전자는 8월 중순부터 솔브레인, 이엔에프테크놀로지 등과 협력해 중국, 대만에서 들여온 불화수소를 일부 공정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SK하이닉스도 국내 업체인 램테크놀러지와 손잡고 불화수소를 공정에 투입했다. LG디스플레이는 공정에 쓰이는 불화수소를 100% 국내 제품으로 쓰겠다고 선언했다.

불화폴리이미드도 재고를 활용해 충분히 대응했다는 평가다. 여기에 코오롱인더스트리, SKC, SK이노베이션 등이 기술 개발을 마치고 양산에 나설 예정이어서 수급에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 업체 관계자는 “불화수소, EUV 포토레지스트 등 3대 품목에 대한 대안 마련이 거의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며 “지금은 규제 영향력이 당초 예상보다 크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고 전했다.

[한일 경제전쟁 100일] 한국 반도체,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 국내 반도체 업계, 새로운 소재 공급 판짜기 시작

한일 갈등 장기화로 불확실성이 커지자, 국내 반도체 소재 생태계 판도가 새롭게 짜여지고 있다.

우선 공급처를 다변화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일례로 삼성전자는 일본 업체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부품과 소재에 대한 전수조사를 마치고, 업무연속성(BCP) 계획 수립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높은 일본 의존도로 '아킬레스건'으로 지적돼 왔던 불화수소, EUV 포토레지스트 거래선 변화가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불화수소 업계는 소자 업체와 국내 소재 업체간 협력으로 국산화 움직임이 빠르게 타진되고 있다. 이달 솔브레인은 제 2공장을 완공하고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게 액체 불화수소 부족분을 공급할 방침이다. 10월 중 시제품이 양사에게 공급되고, 11월달 쯤 공정에 본격적으로 투입할 것으로 알려진다.

박영수 솔브레인 부사장은 “새로운 공장의 정확한 생산능력을 밝히기는 곤란하지만 양사 부족분에 대응할 수 있을만한 양”이라고 전했다.

SK머티리얼즈도 연내 기체 불화수소 시제품 개발을 마치고 내년 본격적인 양산, 공급에 나설 계획이다.

EUV 포토레지스트 시장에서는 소극적이었던 미국 듀폰은 삼성전자와 샘플을 주고받으면서 국내 시장 진입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분주한 움직임과 경쟁사 진입에 기존 강자였던 일본 업체들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메모리반도체, 파운드리 기술을 선도하는 고객사가 국내에 포진한 만큼 이들은 일본 업체들에게 상당히 중요하다. 특히 EUV 포토레지스트 소재 다변화가 일어나면, 범용으로 쓰이는 불화아르곤(ArF) 포토레지스트 매출에까지 큰 타격을 줄 수 있어 일본 업체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이에 일본 EUV 포토레지스트 공급 업체 TOK는 한국 생산을 검토하고 있다. 포토레지스트 생산은 한국에서, 품질 보증과 연구 개발은 기술력을 가진 일본 본사에서 나눠서 진행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진 회사도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소자 업체에서 일본 업체들과 논의를 하면서 자신들이 느끼는 위기 요인을 전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주요 고객사가 몰린 한국 시장 판로가 막힌다면 일본 업체들도 큰 위협을 느낄 것”이라고 전했다.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