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222>어느 손수건 이야기

지난 2000년 어느 기업 총수가 미국 가전매장을 방문하기로 했다. 이미 국내에선 최고 기업이었다. 현지 소비자 반응을 직접 보고 싶었다. 100명 가까운 중역들이 동행했다.

매장에 첫발을 내디디는 순간 충격이 엄습했다. 매장 전면은 소니와 뱅앤올룹슨 차지였다. 그다음 줄에는 필립스, 파나소닉, 도시바, 히타치가 진열돼 있었다. 매장 뒤편에서 찾은 자사 제품엔 '바겐세일'이란 스티커와 함께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한 사람 두 사람 손수건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제품에 쌓인 먼지를 털어 내기 시작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해진 셈이었다.

'레슨 프롬 삼성'이란 기고문을 본 누군가가 이제 우리 기업이 예전의 추격자 방식을 기억에서 지우는 게 낫지 않겠냐고 물어 왔다. 진정 그럴까. 옛 성공 경험은 아예 지우는 게 나을까. 이젠 베낄 곳도 없다지 않은가. 철저히 선도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더 좋은 것은 아닐까.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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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사례 하나를 떠올려 본다. 졸리비는 필리핀 케손시티에서 성업을 이루고 있었다. 패스트푸드점으로 꽤나 인지도를 높인 참이었다. 1981년 문제가 하나 생긴다. 맥도날드가 마닐라에 첫 가게를 연다. 언제나 그렇듯 매장은 곧 번화가를 따라 늘어날 게 뻔했다. 고작 매장 11개짜리 로컬 체인은 먼지처럼 사라질 수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최고경영자(CEO)이던 토니 탄 칵티옹은 여기서 혁신 기회를 찾아보기로 한다. 거인의 어깨를 짚어 경쟁해 보자. 우선 맥도날드의 품질, 매장, 서비스 관리를 배워 보기로 했다. 사실 이만한 교범도 없는 셈이었다. 전 세계 매장 경영을 이만큼 하는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어느 정도 맥도날드 방식이 이해되자 빈 곳이 눈에 들어왔다. 맥드날드는 현지 취향을 따라잡는 데는 젬병이었다. 졸리비는 변화를 만들어 보기로 한다. 그렇다고 거창한 혁신이랄 것도 없었다. 맥도날드란 기준점이 바로 옆에 있지 않나.

현지 고객들 취향에 맞춰 소스는 좀 더 달콤하게 만들었다. 그리 안 어울리기는 하지만 고객이 찾는 프라이드치킨도 메뉴에 넣었다. 가족 단위 고객을 위해 스파게티 같은 메뉴도 만들었다. 깔끔한 매장에 맥도날드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매장 서비스는 한참 앞서 있었다. 기존 고객도 만족했고, 맥도날드가 시장으로 끌어들인 소비자는 졸리비 차지가 됐다.

이렇게 졸리비는 거인을 엿보며 혁신을 축적했다. 맥도날드에 버텨 낸 몇 안 되는 기업이 된다. 그리고 지금 자기 자신이 4500개 넘는 매장을 거느린 글로벌 기업이 됐다. 커피빈앤드티리프의 새 주인이기도 하다.

20여년이 지나 우리 기업들도 어느덧 선두 주자가 됐다. 매장 뒤편에서 주섬주섬 손수건을 꺼내 들게 하던 씁쓸한 기억은 사라졌다. 반면에 앞 열을 채워 주던 소니나 필립스 같은 받침목으로 삼을 곳들도 사라졌다.

지난 성공 방식은 이젠 잊는 게 나을까 하는 질문을 다시 떠올려본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성공 경험은 종종 함정이 된다. 그러나 매몰되지 않으면 지렛대가 된다. 추격자 경험은 얼마든 지금 혁신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 대신 지렛대에 괼 새 받침목을 찾아야 할 테다.
문득 지금 매장 뒤편에 서서 손수건을 꺼내 들고 있을 기업들을 바라본다. 이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222>어느 손수건 이야기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