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원의 미래사회](14) 미래학에 대한 두 가지 오해

 미래사회 칼럼을 연재하면서 독자들로부터 종종 e메일을 받는다. 독자들의 다양한 질문 속에 깔린 생각을 뜯어보면 미래학에 대해 두 가지 공통적인 오해가 있음을 발견한다.

 첫째는 미래학의 존재 의미를 묻는 것인데, 다른 학문들도 ‘미래’라는 말만 붙이지 않았을 뿐 모두 미래를 연구하기에 굳이 미래학이란 학문이 필요한지 묻는다. 예컨대 역사학이라고 과거만 연구하지는 않는다. 연세대에서 중국사를 가르치는 백영서 교수는 필자에게 역사학은 ‘미래와의 대화’라며 역사학이 곧 미래학이라며 껄껄껄 웃은 적이 있다. 자연과학은 어제나 내일이나 변함없이 통용되는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려고 한다. 실증주의 사회학의 문을 연 콩트는 미래를 예측하지 않는 학문은 학문이 아니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미래학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미래학은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 다른 학문은 과거와 현재의 지식을 통해 추세를 그려내고, 이 추세 속에서 미래의 모습을 예측한다. 현재 출산율이 줄고 있으니 미래의 인구는 감소할 것이라든지, 최근 경제 성장률 추이를 통해 미래사회의 1인당 국민소득을 예측하는 것들이 그 예다.

 미래학도 이런 추세를 통해 미래를 예측한다. 그러나 미래학이 발전하면서 추세예측보다는 규범적 미래예측이 발달했다.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이다’보다 ‘미래는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가치개입적인 예측활동이 활발해졌다. 제3세계 국가들이 새로운 사회상을 찾는 과정에서 규범적 미래예측을 활발하게 사용했고, 환경보호론자들도 ‘정확한’ 미래예측보다 ‘바람직한’ 미래예측을 선호했다. 이는 미래는 예측할 수 없으나 바람직한 미래는 만들어갈 수 있다는 깨달음을 반영한 것이다.

 두 번째 오해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면, 미래학자는 무엇을 하는가?’하는 질문에 담겨 있다. 질문의 답으로 위에서 언급한 ‘바람직한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하면 미래학은 윤리학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미래학은 다른 학문과 달리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을 꾸준히 개발했다. 미래예측의 핵심은 다양한 대안을 내놓는 것이다. 미래는 특정한 아이디어나 이즘(ism)이 지배하는 영역이 아니다. 다양한 가치관이 서로 다투면서 조화를 추구하는 시간과 공간이다.

 미래학의 예측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이른바 초기 이슈(emerging issues)를 찾아내고, 이 사건이 현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어떤 산업을 강타할지, 생태계에 어떤 작용을 할지 예측한다. 미래예측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싱가포르·네덜란드·핀란드 정부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기술적, 정치적, 경제적 이슈를 발굴해 사회적 파장을 예측하는 것을 미래예측 활동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어떤 일의 성패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제대로 구분하는데 달려 있다. 미래예측도 마찬가지다.

박성원 하와이미래학연구소 연구원 seongwon@hawaii.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