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문화다]기고/놀이와 매체의 수난사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sangyeun65@naver.com

최근 정부가 청소년 게임 이용을 과도하게 규제하고 그 근거를 만들기 위해 보수언론을 이용, 게임을 마약 취급하는 상황을 접하면서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매체 검열 수난사를 떠올렸다. 대중매체 검열 역사를 되돌아보면 어느 시대든 사랑받는 매체는 항상 중요한 규제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게임은 문화다]기고/놀이와 매체의 수난사

박정희 유신 정권이 지배하던 1970년대에 주된 놀이 매체의 검열 대상은 대중음악이었다. 이 당시에 수많은 곡이 금지곡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는데,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 이유는 아주 황당하다.

지금은 작고한 김상국씨의 `껌 씹는 아가씨`는 사회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금희 `키다리 미스터 킴`은 키 작은 박 대통령을 비하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이장희의 `그건 너`는 사회 불신 조장으로, 송창식의 `고래사냥`은 퇴폐 풍조 조장으로,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은 곡이 시끄러워서, 각각 금지곡이 되었다.

당시 음반을 검열하는 공연윤리위원회는 금지곡의 기준으로 왜색, 창법 저조, 비탄조, 가사 무기력, 가사 저속, 가사 현실도피, 허무감 조장, 냉소적, 치졸함, 야유조, 주체성 없음, 품위 없음, 반항감, 잔인함을 들었다. 검열 기준도 황당하지만 그 해석은 더 황당하다.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금지곡이었는데, 그 이유는 사랑은 아름답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노래는 대중에게 불신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80년대는 이념 출판물이 집중적으로 검열당하는 시기였다. 당시 대학가 이념서클에서 학습하고자 했던 마르크스의 원전과 러시아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은 모두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판매 및 소지가 금지됐다. 또 북한 주체사상을 선전하는 서적과 노동해방을 선전하는 각종 학술서적과 문학작품이 검열 대상이었다. 당시 이념 서적 출판으로 많은 작가와 출판사 직원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가기도 했다. 이념 서적 검열은 학문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의 기본 권리와 충돌하면서 학술 발전의 위축을 가져오기도 했다.

1990년대는 만화와 영화가 마녀사냥의 희생양이었다. 1996년 청소년보호법 제정의 계기가 되었던 이른바 일진회 사건은 사회 사건과 대중 매체의 잘못된 인과론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당시 인근 고등학교 폭력서클들 사이에서 벌어진 폭행 사건을 경찰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폭력 행위의 원인으로 일본 불량 만화가 지목되었고 그 결과 만화가 대대적으로 탄압을 받았다. 간행물윤리위원회는 불량만화로 지목된 만화 총 500만부를 수거해서 폐기 처분했고, 곧바로 청소년에게 유해한 매체를 법으로 규제하는 `청소년 보호법`을 제정했다.

법 제정으로 문화적, 예술적 가치가 높았던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가 청소년 유해매체로 고시되기도 했다. 영화 역시 강도 높은 검열의 잣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이 청소년 유해매체로 고시됐고, `공동경비구역 JSA`가 적대적 남북관계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등급을 상향조정하라는 논란이 있기도 했다.

2000년대 매체 검열의 대상은 게임이 됐다. 게임은 다른 매체와 마찬가지로 등급 분류를 받을 뿐 아니라 추가로 이용 시간을 규제받고 있다. 게임 셧다운제로 인해 청소년의 게임이용물에 한해서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 이용을 금지하고, 문화체육관광부는 별도로 본인과 친권자의 동의에 따라 게임 이용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키는 선택적인 셧다운제를 실시하고 있다. 아직 실행되지 않고 있지만, 최근 교육과학기술부가 청소년의 게임 이용을 시간대에 관계없이 일시적으로 차단하는 쿨링오프제를 강력하게 도입하려고 한다.

게임이 유독 심하게 검열을 받는 것은 청소년의 게임 과몰입이 그만큼 사회적으로 심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게임의 사회적 가치판단이 부정적인 것이 결정적인 이유다.

많은 사람이 게임의 과도한 시간 소비와 게임을 즐기는 속성이 그 어떤 매체보다도 건전한 생활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

게임의 놀이적 속성은 단지 시간만 때우는 아무런 쓸모없는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게임 이용자들이 게임 안에서 즐기는 것은 무언가 그들만의 가치 있는 일에 참여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의 어원을 인도 유럽에 계통해서 찾아보면 `흥겹게 뛰어 놀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게임은 온라인 게임에서 가상세계를 만들고, 게임을 매체로 공통체를 형성하는 것은 과거 동네에서 술래잡기하고, 제기차기 하던 놀이의 속성과 같은 원리를 갖고 있다. 놀이는 인류학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것이다.

놀이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다. 그러나 지배 권력은 인간의 놀이를 통제하기를 원한다. 인간이 놀이에 너무 빠져 있으면 건전한 노동문화가 파괴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비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면서 놀이가 대부분 매체를 통해서 이루어짐에 따라서 놀이를 통제하기 위해 매체를 검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건전한 노동을 해치는 모든 행위를 통제하기 위해 동시대에서 놀이의 주된 매체들은 수난을 받게 됐다.

주목할 것은 권력이 매체를 규제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매체 규제를 통한 인간의 놀이의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다. 게임이 이토록 수난을 당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시간을 소비하는, 즉 노동과 학습의 시간을 대신하는 게임의 놀이의 욕망을 통제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게임을 지나치게 규제하려는 의도는 결국 인간의 놀이의 원초적 욕망을 거세하려는 시도와 같다. 게임은 지금 인간을 훈육하고 노동을 조절하려는 권력의 통제 의지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김시소기자 sis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