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온고지신]지광용 한국원자력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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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온고지신]지광용 한국원자력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기초’ 혹은 ‘기본’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밑바탕’ 또는 ‘사물·현상·이론·시설 따위의 근본’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이 단어에 무던히도 시달린다. 요즘에는 영유아 단계부터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 그리고 사회 일원으로 활동하는 시기까지 끊임없는 ‘기초’ 단련 요구를 받는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 밤낮으로 진땀을 빼고, 이러한 노력은 오늘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오랜 기간 ‘기초’ 다지기에 열정을 바친 우리는 현재 얼마나 ‘기초·기반’이 탄탄한 독립 생명체로 존재하는가?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의 부족함으로 점철되는 인생항로를 끊임없이 헤매고 있는 느낌이 강하다.

자연과학 중에서도 기초과학 분야인 화학을 전공한 나는 다양한 화학분야 중에서도 유독 물리화학, 특히 분광학의 바탕이 되는 양자(量子)화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었다. 학부과정에서 처음으로 접한 양자화학은 고등수학 시간을 방불케 하는 수식과 계산 위주 학문으로 양자의 개념적 이해와 분광학과의 연계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훨씬 나중의 일이지만 훌륭하신 스승님 지도와 꾸준한 독학을 통해 체득한 이 오묘한 자연과학 현상은 이제는 과학적 사고를 뛰어 넘어 모든 삶의 현상을 본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나의 삶의 기본이론으로 재정립되었다.

몇 가지 사례를 통해 필자가 느끼는 생활 속 양자화 개념을 공유하고자 한다. 예로써 높이 차이가 있는 똑 같은 비탈길이라 하더라도 어떤 비탈길은 특수하게 장애인도 쉽게 오를 수 있게 부드러운 연속적인 경사도를 갖게 설치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불연속적인 계단 형태로 시공된 경사로가 주를 이룬다. 후자의 경우 위치 에너지가 계단이라는 불연속적인 단계를 통해 상승하는 현상을 우리는 쉽게 감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양자화 개념이다.

에너지 준위 관점에서 자연계 내 모든 물질의 에너지는 앞서 설명한 양자화 개념으로 고에너지 혹은 저에너지로의 에너지 전이가 일어나는데, 이러한 에너지 변이는 물질이 갖고 있는 고유한 에너지 차이만큼의 에너지 누적 또는 방출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상응하는 에너지 누적량이 부족할 경우 에너지 전이는 절대 일어나지 않고 그저 그 상태에서 충만되어 가는 에너지 누적량 때문에 물질이 회전하거나 떨고만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어떤 물질의 한 단계 에너지 격차가 100이라고 할 때 이 물질에 지속적으로 에너지가 가해져 누적량이 100을 넘는 순간 그 물질 에너지 준위는 한 단계 상승하게 되고, 반면 100을 넘지 못하고 99.99에 머물러도 0.01이 부족해서 한 단계 도약이 불가능해 지는 현상이 바로 양자화 개념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데 외국어를 공부한 사람이면 공통으로 느꼈을 영어 학습을 예로 들어 보겠다. 근래에는 조기교육 열풍이 더 심화됐지만 우리네 시대에는 중고등학교 6년, 대학시절 4년 그리고 사회 활동 내내 영어 학습에 꾸준히 매달려 왔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부족함을 느끼고 획기적인 발전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또한 양자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영어 공부가 앞서 연속적인 경사도를 갖는 비탈길과 같아서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학습한 만큼 발전을 가시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면 지금쯤 대부분 사람들이 영어를 모국어로 쓸 수 있을 정도로 큰 성과를 거두었으리라 사료된다. 그러나 특히 영어 학습은 다분히 불연속적인 양자화 된 단계를 갖고 있어 이러한 미세한 학습량 증가분을 감지할 수가 없고 막연한 기대감으로 학습에 매진하지만 단기적 결과는 그저 그 자리에 머무는 정도로 감지되기에 쉽게 포기하게 된다. 사실은 포기하기 직전에 거의 단계 상승의 99.99인지 모르고 그저 지루함에 손을 놓게 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를 우리가 연속스펙트럼으로 모니터링 할 수 있다면 아무도 영어공부에 실패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단지 이를 무시하고 앞뒤 가림 없이 끈기 있게 꾸준히 시도하는 자만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상태가 한 단계 상승돼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다른 모든 일상도 이 오묘한 양자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듯이 어쩌면 작금의 우리나라 과학계의 기초기술 저변도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부의 기초연구 지원 정책이 눈에 보이지 않는 양자화 한 단계 바로 직전에서 수정되고 방향 전환되어 그 뿌리가 정착하지 못하고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게 아닌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일부 수정이 있기는 해도 수차례에 걸친 정보의 기초연구 지원정책을 기반으로 자양분이 충분한 토양에 이제는 지속적인 물주기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최근 차세대 원자로(SMART) 수출과 같은 커다란 과실은 지속 가능한 정책과 꾸준한 연구에서 나온다. 빛나는 노벨상의 영광도 마찬가지라고 굳게 믿는다.

지광용 한국원자력연구원 선임연구위원 nkyjee@kaer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