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온고지신]권면 국가핵융합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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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 중에서 지식의 폭발적 증가로 문명이 진보한 경우는 두세 번 나타났다.

하지만 지식융합으로 이어져 질적으로 새로운 문명이 나타난 경우는 그리스 민주정 시대(BC510~323) 한번 뿐이라고 한다.

[사이언스온고지신]권면 국가핵융합연구소 연구위원

그리스 민주정 시대에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등으로 대변되는 철학자부터 시문학 소포클레스, 수학 피타고라스와 유클리드, 물리학 아르키메데스, 의학 히포크라테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같은 수 없는 대학자들이 다양한 방면에서 세상을 풍미하던 시대였다.

근대 유럽부터 지금까지 다시 한 번 지식 폭발이 진행 중이며, 두 번째 지식융합 시대가 도래했다고 진단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2500년 전 지식융합은 ‘보편성’ 추구가 그 동력원이었다고 한다. 정착과 도시국가를 이루면서 종족번식과 생명유지라는 본능적 삶에서 벗어날 여유가 생기면서 인간과 자연, 사회와 관계, 삶을 꿰뚫는 보편적 지식을 추구하려는 지적 욕구가 지식 융합을 자연스레 가져왔다.

그럼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지식융합은 무엇이 끌고 가는 것일까?

사실 그동안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때는 갈 길이 정해져 있어 우리 성실성만으로도 어느 정도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따라갈 길이 보이지 않자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찾는 방편으로 전혀 다른 학문과 지식 융합에 눈을 돌리기도 했다.

또 기존 연구조직의 엄청난 관성력을 인위적으로 재편해서, 새롭게 가야 할 길로 전환하기 위한 모멘텀을 주기 위해 융합연구를 시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발적 내적 동력 없이 이러한 주변적인 목표 달성이 더 중요해지면 수단과 도구로서의 융합은 불꽃이 타오르지도 못한 채 사그라질 가능성이 많다.

그럼 어떻게 하면 융합이 시대정신으로 승화되어 자연스럽고 도도한 역사적 흐름으로 우리 과학기술계에도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통섭이라는 개념을 우리에게 소개한 최재천 교수는 ‘통합이든, 융합이든, 통섭이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서로 어울려 갈등을 없애고 화목해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서로는 단지 인간만을 의미하기 보다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사회를 아우르는 말일 것이다. 생태학자로서 그는 일치감치 통섭, 즉 생물학적 융합의 필요성을 자연스럽게 깨달은 것이리라.

2년 전 미국 WTEC(World Technology Evaluation Center)에서 펴 낸 ‘사회를 위한 지식과 기술의 융합’이란 보고서는 개인, 사회 그리고 전 지구적인 필요성이 융합연구를 할 수 밖에 없게 한다고 정리한다. 융합연구는 과학기술의 어떤 정책적 목표 달성을 위해 채택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가 아니라 인류문명 진보를 위한 당연한 귀결인 것을 깨닫는 것이 첫 번째 넘어야 할 과제이다.

다음 단계 문명의 진보를 위해 융합적인 접근이 필수라는 것이 분명해지면 이제 그것을 성공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것이 남은 과제다.

먼저 정책 틀이 융합연구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명제로부터 만들어져야 한다. 중장기적 계획, 연구 기획이나 성과 평가 틀도 바뀌어야 한다. 제도적인 틀과 함께 연구문화도 많은 변화가 필수적이다. 이제 타 분야 연구자들과 협력하고 비판적이며 합리적 논의와 함께 경청과 배려와 같은 양방향 소통능력은 중요한 덕목이 되고 자기 생각을 열린 공간에 펼쳐 보이며 다른 전문가의 비판적 의견을 적극 수용하고 문제 해결과 의견 수렴에 적극적인, 열린 마음도 필요하게 될 것이다.

정립된 연구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수많은 첫 시도는 무수히 많은 실패를 양산하게 될 텐데 실패를 용인하면서도 또 그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부여하고 그러면서도 건강한 긴장과 갈등이 경쟁과 도전을 위한 끊이지 않는 양분이 되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 융합연구를 하려면 이제와는 다른 연구 장비, 남들이 쓰지 않는 장비를 남보다 먼저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또 융합형 인간으로 교육시키는 전면적인 교육개혁이 필요하다. 이 새로운 교육 효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장기간이 소요되겠지만 그 열매를 누리는 기간을 생각해보면 그 시간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융합연구 당위성이 받아들여질 때면 연구조직과 기관은 경쟁력을 갖추고 준비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융합연구는 시대 흐름이 됐다. 이 흐름을 놓치면 다시는 그 흐름에 동승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져야 한다. 이는 인류의 건강함과 삶의 안정감, 안전하고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사회 그리고 지속가능한 인류 삶을 담보해 주는 지구의 자연 환경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선택지라고 믿고 있다.

융합연구는 한 때 유행하다 사라질 연구방법론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인류가 진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권면 국가핵융합연구소 연구위원, kwonm@nfr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