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필호의 실크로드 속으로] (8) 서역인들의 실크로드 ①실크로드의 주역들

[박필호의 실크로드 속으로] (8) 서역인들의 실크로드 ①실크로드의 주역들

우리가 오늘날 서역인이라는 말을 쓴다면 상당히 애매한 개념이 될 것이다. 이 말은 역사적으로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영토 밖 서쪽에 살고 있는 한족 이외의 사람들을 지칭하여 좁게는 서쪽 지방에 사는 위그르인 등을 이르며 넓게는 중앙아시아와 더 멀리는 인도, 페르시아 및 아랍사람들 까지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우리는 현재 중앙아시아 사람들, 페르시아계통 사람들, 터어키계통 사람들, 인도계통 사람들, 아랍계통, 코카사스 계통 등 중국 서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서 적절히 표현할 방법이 없으므로 편의상 그들을 서역인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실크로드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인들이 아니라 서역인들이야말로 진정한 실크로드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중국인들이 실크로드의 주역이 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로는 중국인들은 실크로드를 타고 국경 밖으로 나간 일이 아주 드물었으므로 이용빈도가 아주 낮았음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그 길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길을 건설하고 유지하고 관리하는데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그들이 국경 밖으로 실크로드를 타고 나간 역사적 기록은 사실 몇개 되지 않는다.

한나라 때에 장건(張騫: BC 200 – 114)이 한무제의 명을 받아 일행 99명을 거느리고 중앙아시아를 향해 떠났다가 도중에 흉노에게 잡혀 10년간 억류생활을 하던 중 흉노 처자식과 안내인 하나를 데리고 탈출하여 천산산맥을 넘어 현재의 키르기즈스탄에 들어 간 후 중앙아시아 여러나라를 다닌 것이 중국 최초의 중국인의 실크로드 공식적 탐험기록이다.

그 이후 700여년이 지난 후에 당태종 시절의 현장법사가 황제의 칙명인 출국금지령을 어기고 몰래 국경을 빠져나와 인도를 가기 위해 천산산맥을 넘어 키르기즈스탄 지역으로 들어간 후 현재의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지역을 돌아보고 17년 만에 귀국하였다. 현장법사가 실크로드를 타고 서쪽을 다녀 온 100여 년이 지난 후에는 현재의 신강성(新疆省) 위그르 자치지구에서 안서도호부 부절도사로 있던 고구려 유민의 아들인 고선지가 힌두쿠쉬 고원의 험준한 길을 타고 현재의 파키스탄 북부에 위치한 소발률국(小勃律國: Gilghit)을 정벌한 것이 그 다음의 역사적 기록이다.

그 후 고선지는 당나라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파미르 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 일대를 정벌하다가 아랍과 페르시아 지역을 차지한 압바스 왕조 세력과 일전을 벌인 후 패배하고 당나라로 귀환하였다. 신라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활동했던 승려 혜초도 그 비슷한 시기에 바닷길로 인도에 간 후 인도 지역과 중앙아시아 일대를 돌아보고 파미르 산맥을 넘어 귀환한 후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그 이외에 명나라 초기에 환관 정화(鄭和)가 일곱 차례에 걸친 해상 여행을 하는 동안에 동남아시아와 인도양 인근은 물론 아프리카의 케냐 지역까지 다녀 와 그를 해상 실크로드의 개척자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 외에 역대 중국 왕조들이 인근 국가들에 사신을 몇차례 보내고 국경에 시장을 간혹 개설하거나 조공무역을 통해 교역을 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한나라 시절에 잠시 현재의 신강성 지역을 점령한 적이 있었고 당나라 시절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여 위그르인이 사는 지역을 부분적으로 다스린 사실이 있었을 뿐이다. 그랬던 중국인들이 한족의 입장에서 몹시 멸시하던 여진족의 청나라가 현재의 중국 영토와 같은 크기의 광대한 영토를 모두 장악한 후 결과적으로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에 물려주기 전 까지는 중국인들이 실크로드가 자기들의 소유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사실상 없었던 것이다.

반면 중앙아시아 지역부터 지중해 연안에 이르는 실크로드 구간은 그 지역을 다스렸던 나라들이 끊임없이 관리해왔고 그들 나라들이 카라반세라이 같은 교역 편의시설을 셀 수 없이 많이 세워 수천년의 세월 동안 실크로드를 통한 대상 무역의 증진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알리쉬르 나바이(Ali-Shir Nava’i: AD 1441 - 1501)이다.

나바이는 돌궐-몽골계통 왕조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북부, 이란의 동북부, 우즈베키스탄의 남부 지역을 지배하던 호라산 회교왕국 (Khorasan Khanate)의 재상으로 수십년간 일하는 동안에 실크로드에 설치된 카라반세라이 수백개를 세우고 보수하여 실크로드를 오고가는 대상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그외 모스크, 각종 교육기관(madrasa), 도서관, 병원 등도 수백개를 세워 대상들은 물론 자국민들의 복리증진에도 힘을 쓴 인물이다.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건축물도 세웠으며 유럽의 르네상스에 버금가는 문예부흥을 이루었다는 찬사를 역사가들로부터 받았다.

사실 그는 시인으로서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페르시안어나 아랍어로도 시를 썼지만 주로 몽고계통의 차가타이 언어를 사용하여 시집 30여편을 남겼다. 그의 시는 모두 수천편으로 수십만 운율에 달하며 시 이외에도 법률, 철학, 문학, 종교, 구전문학, 사회문화 등등 여러 분야에 대한 저술도 많이 남겼다. 그의 사상, 철학, 종교, 문학은 중앙아시아 지역을 말할 것도 없고 동으로는 인도의 무굴제국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서로는 오토만 제국에, 북으로는 러시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나바이는 젊은 시절 동문수학했던 그의 친구가 권력다툼 끝에 왕이 되자 재상으로 부름을 받고 32년간 근무하였는데 평생 결혼을 한 적도 없을 뿐더러 어느 여자도 가까이하지 않고 오로지 정사를 돌보면서 동시에 저술을 하는 등 실크로드 문화에 큰 업적을 남기고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소수민족의 종교나 문학 등을 말살시켜려는 경향이 있던 소비에트 러시아에도 1942년 그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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