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3>대든 게 아닌 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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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을 `의사소통`이라고 폼 나게 번역하지만 30년 전까지 `의사소통`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의사 전달` 의미로 통용되다가 1980년 중반 이후 `소통`이라는 개념이 정립됐다. 수직의 계급 사회에서는 `소통`이란 개념을 찾기 어려웠다. 속된 말로 `까라면 까`라는 명령만 있었다. 그게 `전달`이다.

친정아버지와 대화를 하려면 심호흡부터 하는 버릇이 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말씀을 경청할 때 눈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아버지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버릇없음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야단을 맞을 때는 이유와 정당성에 대해 항변 한 번 못했다. 천근처럼 무거운 고개를 그저 숙이고만 있어야 했다. `왜 그랬는지` 물어 놓고 대답하면 말대꾸한다고 야단치셨다. 이렇게 길들여진 자식이 쉰 넘은 어른이 됐다고 달라질 리 없다. 지금도 아버지와 대화를 한다는 것은 여전히 불편하고 힘들다.

몇 해 전인가 내가 아버지께 목소리를 높인 상태에서 의견을 개진했다. 자식이 `대들었다`고 느끼신 아버지는 분해서 며칠을 앓아누웠다. 그 후 가족회의에서 아버지 가시는 날까지 `대들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모뿐만 아니라 선생님이나 상사의 의견에 반대하기는 힘들다. 이견을 피력하면, 그것도 목소리가 커지면 윗사람으로부터 `대들었다` `일하기 힘들겠다` `가정교육이 문제다`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1990년대 중반에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이야기다. 미국 교사가 한국에서 온지 얼마 안 된 학생 부모를 호출했다. 교사는 부모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당신 자식이 나와 얘기할 때 고개를 들지 않는다. 혹시 자폐 증세가 있는 것 아닌가?” 교사가 이야기할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열중쉬어` 자세로 있는 한국계 학생이 이상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부모는 한국 사람은 어른과 얘기할 때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게 예의라고 변명했지만 미국인 교사는 상대방 눈을 피하는 행동은 결례라고 힘줘 말했다. “어떻게 사람과 얘기를 하는데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생각을 말할 수 있나”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면서 정상 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고 야단쳤다.

나 역시 `두 눈 똑바로 쳐다보며`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아이들이 한동안 불편하고 버거웠다. `대들었다`는 느낌에 자존심이 상했고, 잘못 키웠나 싶어 자괴감도 들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내가 `대들었다`고 생각한 그들의 행동은 자신의 권리와 주장을 내세우는 과정일 뿐이었다.

방송사 가요 프로그램 가운데 챙겨 보는 프로그램이 `불후의 명곡`이다. 선배 가수 노래를 후배 가수가 편곡하거나 재해석해서 자신의 색깔을 담아 경연한다. 얼굴만으로 승부에 임하는 줄로 알고 있던 아이돌 가수가 뛰어난 가창력으로 나와 같은 세대의 젊은 날 아픔과 사랑을 노래할 때 울림이 크다. 그들은 이렇게 우리를 재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즐거움은 덤이다.

젊은이와 소통하려면 그들을 이해하면 된다. 우리 세대가 청바지에 통기타 들고, `마이마이` 들고 돌아다니던 것도 우리 아버지 세대에게서는 반항처럼 보였을 것이다.

당신의 아들, 후배, 부하는 지금 대드는 게 아니다. 대화하는 방법이 우리 세대와 다를 뿐이다. 행여 대든다 해도 조금 내버려 두자. 우리가 철들 때 그렇게 한 것처럼. 그래야만 우리가 지금도 좋아하는 `동물원`과 `김광석`이 그들의 손에서 재해석될 수 있다.

문화칼럼니스트 sarahs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