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 화학물질 영업비밀 사전심사제도 도입땐 첨단 산업 다 죽는다

물질안전보건자료(MSDS:Material Safety Data Sheet)는 화학물질을 안전하게 사용·관리하기 위해 제조자명, 제품명, 성분, 취급주의 요소, 사고시 응급 처치 방법 등을 기재한 문서다. MSDS란 개념은 1983년 미국에서 처음 나왔다. 노동성 산하 노동안전위생국(OSHA)은 화학물질이 근로자에게 유해할 수 있다고 판단, MSDS를 작업장에 비치하도록 강제했다. 우리나라 역시 현행 화학물질관리법과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화학물질을 공급하거나 제공받아 활용하는 업체는 MSDS를 작성해 사업장에 비치해야 한다.

[이슈분석] 화학물질 영업비밀 사전심사제도 도입땐 첨단 산업 다 죽는다

◇영업비밀 사전심사제도 도입 추진 배경은

해당 화학물질이 영업 비밀이어서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구성 성분과 함유량은 비공개 처리할 수 있다. 영업 비밀 판단은 부정경쟁 방지 및 영업 비밀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른다. 공공연히 알려져 있지 않고 상당한 노력으로 비밀이 유지된 생산·판매·영업 정보가 여기 해당한다. 기본적으로 기업이 영업 비밀 여부를 판단하지만 이를 남용했을 때 정부는 누락, 거짓 작성 근거를 들어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다. 또 유해성이 입증된 물질은 영업 비밀로도 가릴 수 없도록 법제화했다.

노동계에선 유해하지 않은 물질이라 하더라도 MSDS 내 영업 비밀 여부를 기업이 판단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대표 조직이 바로 반올림이다. 민주노총의 후원을 받는 이 조직은 지난 10년 동안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죽음의 사업장'으로 묘사하며 각 공정에서 쓰이는 모든 화학물질을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치권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법 개정을 통해 '화학물질 영업비밀 사전심사제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조사 자료를 인용해 “현재 국내에선 MSDS의 67%가 영업 비밀이라는 이유로 비공개된 채 사용되고 있다”면서 “유럽, 캐나다, 미국의 경우 예외를 제외하면 원칙적으로 MSDS 내 영업 비밀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같은 당 송옥주, 김영주, 신창현 의원도 비슷한 개정안을 발의했다. 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화학물질 영업 비밀 판단은 심의위에 맡겨야 한다. 심의위는 노사 동수로 구성하겠다는 것이 더민주 의원들의 제안이다. 강병원 의원의 개정안에 따르면 심의에서 영업 비밀로 인정됐다 하더라도 유효 기간은 3년, 심의를 거쳐 2회까지만 연장할 수 있다. 9년 이후에는 무조건 공개해야 한다.

◇선진국과 기준 달라…한국은 이미 규제 과도

그러나 노동계와 강 의원 등 정치권의 주장은 일부 사실과 다르다. 유럽연합(EU)이나 캐나다가 영업비밀 사전심사제도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MSDS 기재 기준 자체가 상이하다. 이들 선진국은 유엔이 권고한 GHS(Globally Harmonized System)에 따라 유해성이 있다고 판단된 물질만 MSDS에 기재한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유해성 없는 물질도 모두 MSDS에 기재하도록 법으로 정해 뒀다.

EU나 캐나다는 유해성 있는 물질도 사전심사제도를 통해 보호 이유를 입증하면 영업 비밀로 가릴 수 있다. 미국은 유해성 물질도 산업계가 스스로 영업 비밀 여부를 판단하도록 했다.

우리나라는 산업안전보건법에 지정된 관리 대상 유해 물질 약 260종과 화학물질관리법상 유독 물질 약 800여종을 포함한 1060여종의 물질은 영업 비밀이라 해도 가릴 수 없게 했다. 해당 물질은 MSDS에 반드시 기재해야 한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이 같은 사실을 설명하며 “한국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MSDS 제도를 엄격히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해하지 않은 물질을 영업 비밀로 가려 놓았다 하더라도 필요할 경우 이를 공개하는 법적 근거도 마련돼 있다. 근로자를 진료하는 의사, 보건관리사, 산업보건의 또는 근로자 대표는 중대한 건강 장해가 발생할 경우 MSDS에 가려 놓은 영업 비밀의 정보 제공을 요구할 수 있다.

산업계 관계자는 “선진국과 비교해 이미 국내 규제는 과도한 실정”이라면서 “이를 무시하고 화학물질 영업비밀 사전심사제도를 골자로 한 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 예기치 않은 기술 유출 증가, 신물질 도입 지연으로 첨단 산업의 경쟁력이 크게 저하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